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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2차세계대전사

[1943. 5. 11] 2차대전 중 유일하게 미국 영토에서 벌어진 지상전인 아투 전투 개시

라마막 2023. 5. 11. 18:56

1943년 5월 11일, "아투(Attu)" 작전 간 토머스 킨케이드(Thomas C. Kinkaid) 소장이 지휘하는 제 16 기동함대는 북태평양의 차가운 안개를 헤치고 미 제 7보병사단 소속 3,000여 장병을 알류산 열도에 상륙시켰다.

: 사실 따지자면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유일하게" 미국 영토에서 싸웠던 전투. 알류산을 방어한 일본군은 야마자키 야수요(山崎保代) 대좌가 지휘하는 2,650명의 방어전력으로 섬을 수비했으나 미군이 상륙을 시도하자 해안에서 차단하는 대신 섬 안쪽으로 들어가 벙커를 파고 들어갔다.

미 서부방어사령관인 존 드윗(John DeWitt) 대장은 앨버트 브라운(Albert Brown) 소장이 지휘하는 7 보병사단 예하의 17보병연대를 상륙부대로 지정해 급파했다. 유진 랜드럼 준장(Eugene Landrum: 참고로 한국전쟁 때 8군 참모장으로 참전해 '낙동강 방어선' 구축을 건의했던 인물이다)이 상륙부대를 지휘하는 가운데, 상륙 전 킨케이드 소장의 16기동함대는 해안에 준비사격을 실시했으나 위에 언급했듯 야마자키 대좌가 내륙으로 들어간 후였기 때문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상륙이 시작된 후부터는 처절한 백병전의 현장이 되어 버렸다. 특히 혹독한 북태평양의 기후로 인해 동상 환자가 속출하면서 비전투 손실이 크게 늘었지만, 두 주 동안의 전투로 미군은 일본군을 아투(Attu) 섬 끝단의 작은 반도에 가두는데 성공했다. 섬 끝에 고립된 일본군은 혹시라도 포위를 뚫고나가 구출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안고 야마자키 대좌의 지휘하에 “반자이 돌격”을 실시했다. 갑작스러운 일본군의 돌격에 놀란 미군 전열은 흐트러졌으나, 후열까지 전투에 가담하기 시작하면서 알류산은 백병전의 혈투장으로 변했다.

사실상 모든 일본군이 전멸할 때까지 백병전이 이어진 가운데, 대부분의 전투는 5월 29일자로 종료됐지만 미 해군 측은 30일 오전에도 산발적인 소규모 집단의 저항이 있다고 보고를 올렸다. 총 19일간의 전투를 통해 미 제 7사단은 549명이 전사하고 1,0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으며, 일본은 야마자키 대좌 자신을 포함한 2,850명이 전사하고 29명 만이 포로로 생포당했다.

일본도 모처럼 미국 본토로 가는 발판인 이 곳을 상실하기 싫어 도쿄 만에 구원 함대를 집결시켰으며, 항모 즈이카쿠(瑞鶴), 쇼카쿠(翔鶴), 준요(隼鷹), 히요(飛鷹) 뿐 아니라 전함 무사시(武蔵), 공고(金剛), 하루나(榛名), 순양함 모가미(最上), 중순양함 구마노(熊野), 스즈야(鈴谷), 토네(利根), 치쿠마(筑摩), 순양함 아가노((阿賀野), 오요도(大淀) 및 구축함 11척을 준비했다. 하지만 이들이 알류산까지 도착하기 전에 미군이 열도를 전부 수복했기 때문에 대규모 함대의 원정작전은 무위로 돌아갔다.

사실상 북태평양 지역에서의 작전이 불가하다는 판단을 내린 일본은 이 전투 후 알류산에 남겨져 있던 마지막 부대인 키스카 섬 방어부대를 철수시키기로 했으며, 이들은 1943년 7월 28일에 우연하게 안개가 낀 아침에 아무도 모르게 섬에서 철군하는데 성공했다.

이 전투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연합함대 사령관이 미군기에게 격추당해 전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발생했기 때문에 대본영의 사기는 크게 꺾였다. 알류산의 철군 후 일본은 대전 기간 중 미 본토에 두 번 다시 발을 올리지 못했으며, 실질적으로 북태평양 전역을 단념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2차세계대전 #전쟁사 #역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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