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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4. 8] 독일군 포로를 이송 중인 미 제100대대 소속 재미 일본인 병사

라마막 2023. 1. 8. 18:45

 

1945년 4월 8일, 미 제 100보병대대 소속 샘 요시하나(Sam Yoshihana)가 독일군 포로를 인솔 중인 모습. 그는 일리노이 주 시카고 출신이며, 이 사진은 이칼리아 리구리아(Liguria)와 발레키아(Ballecchia) 마을 전투 후에 촬영된 것이다.

진주만 공습이 터지면서 일본의 기습을 받은 미국 내에서는 '재미 일본인'들, 통칭 '니세이'들이 미국 내에서 조상의 나라의 편에 서서 '제5열' 노릇을 할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당시 이 문제를 놓고 FBI의 에드거 후버(J. Edgar Hoover, 1895~1972) 국장마저 조사 후 니세이들의 내통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를 올렸지만, 하필 진주만에서 격추된 일본군 조종사 니시카이치 시게노리(西開地 重徳)가 니이하우 섬으로 추락해 원주민들의 치료를 받다가 진주만 공습 소식을 들은 원주민들이 적대적으로 돌아서자 섬 내 재미일본인들의 도움을 받아 탈출하던 중 살해당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 때문에 재미 일본인에 대한 우려가 커졌고, 특히 미 서부방어를 담당하던 존 드윗(John L. Dwitt, 1880~1962) 대장이 재미 일본인 격리를 주장했다.

결국 미 본토에서 일본과 가장 가까운 캘리포니아주가 임의로 재미 일본인 격리를 시작했고, 역으로 연방정부를 설득하면서 적국 국민법(Alien Enemies Act)이 통과됐다. 처음에는 루즈벨트 대통령도 이 법안에 부정적이었으나 전쟁이 본격화되자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하여 미 서부해안 주 내에서 재미 일본인 격리가 시작됐다.

하지만 이들 재미 일본인들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로, 정체성 면에서 스스로를 미국인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이 사건을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곧 자신들의 충성심을 증명할 기회를 요구했고, 자발적으로 자원 공병대대를 꾸린 후 하와이 군정관인 델로스 에먼스(Delos Emmons, 1889~1965) 중장에게 탄원서를 냈다. 에먼스 장군은 우선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VVV(Varsity Victory Volunteers)라는 임시 부대를 편성한 후 제 34 공병연대 예하로 배치했다. 이들은 이후 11개월간 몸을 아끼지 않고 헌신적으로 공병작업을 수행했으며, 이에 따라 미 육군도 재미 일본인에 대해 다시 판단했다.

1942년 12월, 존 맥클로이(John McCloy, 1895~1989) 전쟁부 차관이 VVV를 직접 순시한 후 결심을 내렸다. 그의 명령에 따라 미 전쟁부는 일본계 주축이던 하와이 주 방위군의 298/299 방위대를 중심으로 부대를 개편해 제 100 보병대대를 창설했다. 그리고 100대대는 창설과 함께 부대 구호를 <진주만을 기억하자(Remember the Pearl Harbor)>로 정했다.

100대대는 어쨌든 일본과 내통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차단하기 위해 유럽에 배치됐으며, 100대대가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자 미 서부 뿐 아니라 미 전역의 재미일본인을 대상으로 자원병을 모집해 제 442 연대전투단(442nd Regimental Combat Team)을 별도 창설했다. 442연대 역시 독특한 부대구호로 유명한데, 이들은 "모든 것을 걸고 싸운다(Go for broke)"를 모토로 정했고, 실제로 442연대원들은 자신들 등 뒤의 재미 일본인 교포 사회를 모두 걸고 싸웠다.


당연히 전개 초기부터 이들은 타 미군 부대의 차별과 멸시를 받았다. 가뜩이나 이민사회에서 지위가 낮던 동양계 중심의 부대인데다 실제 추축국인 일본계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 부대에는 일본인 외의 동양인도 포함됐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몬테카지노 4차전에서 전투가 교착에 빠졌을 때 적지에 단독 침투하여 독일 병사를 납치해 적전 후방에 기갑자산이 없다는 결정적인 정보를 얻어 마크 클라크(Mark W. Clark, 1896~1984) 장군이 직접 현장에서 전속부관의 계급장을 떼다 대위로 진급시켰던 훗날의 김영옥 대령도 있었다.

100대대는 1943년 9월부터 본격적으로 전투에 참전해 가장 처절하고 위험한 현장마다 투입됐으며, 1944년 6월에는 후발로 따라온 442 연대전투단과 통합됐다. 이들은 이탈리아, 남부 프랑스, 독일에서 싸웠으며, 처음 4,000명 규모로 시작한 부대는 종전까지 1만 4천 명으로 증원됐다. 그 중 총원의 67%에 달하는 9,486명이 최소 한 개 이상의 퍼플하트(Purple Heart) 훈장을 수여 받았고, 21명이 명예 대훈장을 수상했으며 대통령 부대표창도 8회나 받았다. 심지어 이 8개의 부대표창 중 5개는 한 달 기간동안 수여받았을 정도로 이들은 숨가쁘게 치열한 전장을 뚫고 달렸다. 이 때문에 100대대는 별칭으로 '퍼플하트(전상장) 대대'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다.

웃지못할 일화 중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이들이 전투를 치른 뒤 표창을 하기 위해 70사단장인 존 달퀴스트 소장이 도착해 442 연대장에게 전원을 한 자리에 모으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곧 몇 명 모이지 않은 것을 본 달퀴스트 소장은 '지금 전원이 모이라고 했는데, 명령 불복종인가?'라고 연대장에게 묻자 연대장은 뒤를 둘러본 뒤 이렇게 대답했다.

"장군님, 그게 아니라 여기 모인 사람이 연대원 전부입니다. 이 자리에 없는 연대원은 죽었거나 병원에 누워있을 뿐입니다."

한편 미국에 있던 격리 '니세이'들은 격리캠프에서 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고, 미 대법원은 1944년 12월 18일에 가서야 재미일본인 격리조치가 위헌이라고 판결을 내린 뒤 격리시킨 모든 재미 일본인의 귀향을 허가했다. 미 정부는 클린턴 행정부 시기인 1998년에 가서 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이끈 프레드 고레마쓰 변호사에게 대통령 자유대훈장(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수여했고, 마찬가지로 2012년에는 격리캠프에서 저항했던 엔도 미쓰에 여사에게 같은 훈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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