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오늘의 역사

사진과 함께 살펴보는 세계 속 이야기

전쟁사/2차세계대전사

[1944. 12] 명예대훈장을 수여 중인 윌리엄 할시 제독

라마막 2023. 1. 21. 16:02

1944년 12월, 미 제 3함대 사령관 윌리엄 F. 할시(William F. Halsey, Jr. 1882~1959) 제독이 미 해군 전함 뉴저지 함(USS New Jersey, BB-62)에서 명예대훈장(Medal of Honor) 표창식을 실시 중인 모습.

: 현재까지 미 해군의 마지막이자 단 네 명 뿐인 원수(Fleet Admiral, 5성제독). 앞서 원수를 단 윌리엄 레이히(William Leahy, 1875~1959/미 총사령관 참모장[현재의 합동참모본부 의장]), 어네스트 킹(Ernest J. King, 1878~1956/해군참모총장), 체스터 니미츠(Chester W. Nimitz, 1885~1966/미 태평양사령관) 원수와 달리 종전 후 미 의회 승인으로 원수로 진급했다.

뉴저지 주 엘리자베스(Elizabeth, NJ) 태생으로, 부친인 윌리엄 할시(William F. Halsey, Sr., 1853~1920) 역시 미 해군에서 대령까지 진급했다. 그는 고교 졸업 후 미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지만 2년 대기 기간이 걸려 그동안 버지니아 대학교(UVA: University of Virginia) 약대에 진학했으며, 이후 군의관으로 해군에 입대했다. 그러던 중 5년이 지나서야 해사에서 입학 허가가 나오자 1900년에 입학했다.

그는 1904년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 대통령이 '강력한 해군'을 양성하기 위해 추진한 '위대한 백색함대(Great White Fleet: 강철로 건조한 전함만 뽑아 전세계 일주를 시킨 사업)'에 참가했으며, 곧이어 1차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땐 구축함 쇼(USS Shaw, DD-68)함을 지휘했다.

그는 전후인 1935년, 당시 해군 항공국장이던 어네스트 킹 소장의 추천으로 상대적으로 한직이던 항모 함장으로 보직되어 새러토가(USS Saratoga, CV-3) 함장이 되었다. 할시는 기왕지사 항모 함장이 된 김에 항공에 대해서도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12주짜리 해군 조종사 과정에 입교했는데, 이 계기에 대해 "기왕 하는 거, 내 자신이 항공기를 몰 줄 아는 게 낫지, 조종사들이 알아서 잘해주길 빌기만 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는 1935년 5월 15일에 52세의 나이로 조종면장을 받았는데, 이는 미 해군 역사상 최고령으로 면장을 받은 사례로 기록됐다. 그는 면장을 받으면서 딸에게 이런 편지를 남겼다.

"이 늙은 멍청이가 하는 짓을 어떻게 생각하니? 이 바보는 지금 하늘을 나는 방법을 배우고 있단다!"

이 때문에 그는 미 해군 제독 중 항공작전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게 된 몇 안되는 인물이 되었으며, 훗날 2차 세계대전을 치르면서 대규모 항모전력을 운용할 수 있던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는 1938년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당시 미 해군도 준장 계급이 없었음), 이후 항모전투전력 전반을 책임지게 됐다.

태평양 전쟁이 개전했을 당시 그는 엔터프라이즈(USS Enterprise, CV-6)을 중심으로 한 항모 전력을 지휘하고 있었으며, 진주만 공습으로 미 해군 전체가 항모 전력을 중심으로 재편하게 되자 그 핵심인물로 떠올라 일본군을 상대했다.

할시 제독은 연합군 남태평양 지역(South Pacific Area: SOPAC) 사령관을 맡았으며, 전쟁을 치르면서 과달카날 전투(1942~1943), 솔로몬 제도 전투(1942~1945), 레이테 만 전투(1944) 등 주요 전투를 치렀다. 그는 미 해군 전력이 진주만의 피해를 딛고 회복되기 시작하면서 신설된 미 제 3함대 사령관에 보직됐으며, 이후 전쟁이 끝낼 때까지 이 보직을 유지했다. 특히 그가 치른 전투 중 가장 중요한 전투는 레이테 만 전투로, 이는 전세계 해전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전으로 손꼽힌다.

할시 제독은 2차 세계대전이 종전하자 도쿄(東京) 만으로 이동해 1945년 9월 2일 미주리함 항복식에 참석했으며, 그 직후 미 본토로 돌아갔다. 그는 54척으로 구성된 미 제 3함대를 미 서부 해안으로 귀환시킨 뒤 1945년 10월 27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거행된 연례 해군의 날 행사에 기함 사우스 다코타(USS South Dakota, BB-57)함을 타고 참가했다.

할시는 1945년 11월 22일 미 해군장관실 특별보좌관으로 보직 되면서 함대 사령관에서 물러났다. 미 의회는 이 때 공적 평가를 통해 한 명의 해군 대장을 원수로 올리는 안을 논의했는데, 후보로는 미드웨이 해전의 영웅인 레이먼드 스프루언스(Raymond A. Spruance, 1886~1969) 대장과 할시 대장 두 사람이 올라갔다. 미 의회는 면밀한 논의 끝에 태평양 전쟁 전체에 걸쳐 공적이 더 확실했던 할시를 선택해 1945년 12월 11일에 그를 네 번째이자 현재까지 마지막으로 미 해군 원수 계급을 부여했다.

할시 원수는 1947년 3월에 은퇴했으나 인사법에 따른 원수 계급 규정에 따라 현역 신분은 평생 유지됐다.

그는 전후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중요했던 무기 체계가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만약 태평양 전쟁의 승리를 가져오는데 기여한 도구와 장비를 생각해본다면, 나라면 이런 순서로 기여했다고 하겠다. 첫째는 잠수함이고, 둘째는 레이더이며, 셋째는 항공기이고, 넷째는 불도저였다."

할시 제독은 은퇴 후 국제 전화전송 주식회사(ITT: International Telephone and Telegraph Co.) 자회사 이사회 위원을 지냈으며, 1950년대 말까지 뉴욕 브로드웨이 인근 ITT 빌딩 최상층에 사무실을 갖고 있었다. 그는 말년에 미 해군이 엔터프라이즈 함을 폐기하려 하자 이를 박물관함으로 운용하자는 의견을 내 적극적으로 활동했지만 함정 유지를 위한 예산 마련에 실패해 함정을 살려내지는 못했다.

그는 1959년 8월 16일, 뉴욕 피셔 섬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심장마비가 와 7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유해는 워싱턴 국립 대성당(Washington National Cathedral, 워싱턴 D.C.의 성공회 성당임)에 안치됐다가 8월 20일에 알링턴 국립묘지로 이장됐다.

그는 말년에 태평양 전쟁에서 그의 공적이나 역할을 묻는 인터뷰에 대해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위대한 사람이란 것은 따로 없고, 그저 필요에 따라 평범한 이들이 특별한 상황을 강요 받은 위대한 도전이 있었을 뿐이다."

#2차세계대전 #전쟁사 #역사사진 #태평양전쟁 #인물사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