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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2차세계대전사

[1946. 6] 수감자들을 고문하고 학대한 여성 SS 대원

라마막 2023. 2. 7. 12:51

체포된 아넬리제 콜만.

여성 SS 대원인 아넬리제 콜만(Anneliese Kohlmann, 1921~1977)의 체포 직후 모습. '악마'로 불리던 그녀는 전쟁 중 격리수용소에서 간수로 지내면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콜만이 간수로 지낸 기간은 길지 않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참혹한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특히 유대인 여성들을 고문하면서 피를 흘릴 때까지 채찍으로 후려치고, 수용소의 수감된 여성들에게 성고문을 자행한 일화가 유명하다. 그러던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연합군이 진주해오자 수감자였던 척 하면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콜만의 최초 임무는 노이엥가메(Neuengamme) 수용소 산하에 설치됐던 노이그라벤(Neugraben) 수용소의 간수 역할이었다. 그녀는 수감된 여성 수용자들이 대전차 호를 파는 작업을 감독했다.

수감자들은 훗날 증언을 하면서 콜만이 여성 수감자들의 얼굴과 손이 피범벅이 될 때까지 폭행하곤 했다고 하며, 한 번은 한 여성의 팔이 파랗게 부어오를 때까지 쳐 댔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악행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한 번은 임신 중인 여성을 의도적으로 폭행했으며, 그녀의 얼굴은 수 주가 지날 때까지 계속 부어있었다고 한다. 언젠가는 한 수감자가 배고픔을 못이기다가 빵을 훔치다 잡혀오자 채찍으로 30회 이상 후려쳐댔다.

콜만은 체포 후 내내 수감되어 있다가 19466월에 군법재판소에 섰다. 그녀가 저지른 일들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군 법무관은 수감되어 있던 수감자를 여럿 불러 그 자리에서 증언하게 했으며, 일부는 그녀를 다시 보기조차 끔찍해 했으므로 별도 인터뷰를 진행한 뒤 녹음 테이프를 법정에서 틀었다. 그녀는 스스로 변론을 하면서 자신이 여성들을 폭행했던 이유는 '놔뒀다간 남성 간수들이 더 끔찍하게 폭행했을 것이므로, 자신의 선에서 끝내려 했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녀는 자주 수감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줬으므로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스스로 주장했다.

그녀는 관대한 판결을 해 달라고 최후의 변론을 하면서 자신은 '간수로 오로지 5개월 밖에 지내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자신에게 죽은 이도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콜만은 수용소의 수감자들을 물리적, 정신적, 감정적으로 폭행한 혐의가 적용되었지만 고작 2년형을 받았다. 심지어 그녀는 바로 다음날 석방되어 연합군 교도소에서 걸어나갔다. 왜냐면 체포 직후부터 법정에 설 때까지 이미 2년을 감옥에서 지냈으므로 형기가 만료됐기 때문이다.

: 함부르크 태생으로, 실제 SS 여성 예비대에 가입한 것은 194411월이었다. 최초 노이엥가메에 배치됐지만 19453월에는 함부르크의 강제노동 수용소로 옮겼으며, 두 달 뒤 연합군에게 수용소가 해방되자 수감자들의 옷으로 갈아입고 탈출했다. 하지만 베르겐-벨젠(Bergen-Belsen) 인근에서 예전 수감자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신고한 덕분에 연합군에 체포됐다.

이후 그녀는 재판 때까지 계속 첼레(Celle)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으며, 이 곳에서 2년을 보냈다.

재판에서 그녀의 유죄를 확정지은 혐의는 임신중인 여성을 폭행한 혐의와 빵을 훔치던 수감자를 30회 이상 채찍으로 후려친 혐의, 그리고 자신보다 어린 여성 수감자들을 성적 착취한 혐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년형 밖에 안 나온 이유는 SS 재직기간이 짧고, '죽인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는 주장을 재판부가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석방 후 그녀는 함부르크에서 계속 거주하다가 1965년 서 베를린으로 이주했으며, 1977917일에 65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사망했다.

콜만은 이스라엘의 극작가인 요나탄 칼데론(Yonatan Calderon)의 연극인 <언더 더 스킨(Under the Skin)>의 주인공 중 하나로 등장하며, 이 연극에서 레즈비언 나치 지휘관(=콜만)은 유대인 수감자 하나와 연인 관계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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