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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625전쟁사

[1950. 11. 26] 중공 인민지원군, 625 전쟁 개입

라마막 2023. 11. 27. 12:13

1950년 11월 26일,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의 인민지원군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패퇴일로를 걷고 있던 북한 인민군 지원을 위해 6.25 전쟁에 개입했다.

북한은 1950년 6월 25일부터 한반도의 공산화를 목표로 남침을 개시했으나, 미국이 지휘권을 받아 행사하게 된 국제연합군(UN군)이 창설되며 신생 국가인 대한민국 구원에 나섰다. UN군과 한국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처절한 방어전을 치르는 찰나 세계 각지에서 증파된 UN군은 인천에 집결해 기습상륙을 실시했고, 이 한차례의 기습으로 양분된 인민군은 UN군과 낙동강의 한미연합군 사이에 끼어 괴멸했다.

이후 UN군과 한국군이 북상을 개시하며 평양을 점령했고, 곧 종전 시점이 다가오려는 순간 한반도에 통일 반공국가가 탄생하는 것을 보고있을 수 없던 중국은 전격적으로 참전하면서 순식간에 UN군과 한국군을 다시 38선 이남으로 밀어냈다.

625 전쟁에 개입한 중국은 약 300만 명을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투입했으며, 결과적으로는 한반도에 '통일된' 자본주의 기반 반공국가가 들어서는 것을 와해시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후 전개에서 전쟁에 승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입은 피해도 작지 않았다. 국가 주석이던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의 장남인 마오안잉(毛岸英, 1922~1950)이 이 전쟁 중 폭사해 후계자를 잃은 마오쩌둥은 자신의 왕조 수립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아울러 이 전쟁에서 입은 피해가 예상보다 커짐에 따라 이전에 끝내지 못한 '국공내전'을 완성하기 위해 타이완을 침공하려던 계획도 보류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또한 625 전쟁을 치르면서 국공내전으로 다소 과장됐던 중국군의 능력이 서방 측에 드러난 것도 작지 않은 피해였다. 또한 이 전쟁 중 미군의 포로가 된 다수의 중국군 병사들이 중화민국 측의 선무공작에 휘말려 귀국을 포기하고 타이완 행을 택해 군의 장기적 사기와 정치 선전적 측면에서도 타격을 입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625에 개입하면서 얻은 중국의 득실을 계산해본다면 결국 '제로'에 가깝다는 것이 중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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