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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625전쟁사

[1953. 4. 23] 625에 참전한 패튼 장군의 아들

라마막 2023. 12. 13. 13:34

1953년 4월 23일, 강원도 인제군 인근에서 자신의 M46 패튼(Patton) 전차를 배경으로 선 조지 패튼 4세(George S. Patton IV, 1923~2004) 대위와 버나드 프레스키(Bernard Preskey) 중사의 모습. 이들은 당시 미 제 40보병사단 140 전차대대 A 중대의 중대장과 중대원이었다. 당시 140 전차대대 예하 2개 중대는 한국군 제 12보병사단을 지원하고 있었다.

이름으로 알 수 있듯, 패튼 대위는 2차세계대전의 전쟁영웅인 조지 패튼(George S. Patton, 1885~1945) 대장의 친아들이다. 당시 그는 한국에 부임한지 2개월 차였으며, 휴전선 경계를 놓고 UN 진영과 공산진영이 마지막 전력을 쏟아넣는 치열한 시기에 한국에서 싸웠다. 그는 8월 휴전 무렵까지 은성훈장과 전상장(Purple Heart)을 수여 받았다.

: 귀국 후 웨스트포인트 미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부임했으나, 당시 해사-육사 간 교수 교환 프로그램이 체결되어 애나폴리스 미 해군사관학교로 옮겨 한동안 교편을 잡았다.

그는 1962년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자 미 베트남 군사지원사령부(MAC-V: Military Assistance Command-Vietnam)에 소속되어 베트남 땅을 처음으로 밟았으며, 이후 귀국했다가 중령으로 진급해 다시 미 제 1기갑사단 81 기갑연대 1대대장으로 다시 베트남에 돌아왔다. 하지만 불과 3개월 만에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던 패튼 중령은 1968년에 다시 주 베트남 미 육군(US Army Vietnam) 사령부 작전기획참모로 돌아와 1년간 근무했다. 마지막 베트남 근무 중이던 1968년 말, 패튼은 대령으로 진급하면서 제 11 기갑수색연대 연대장에 보직됐으며, 이 때 헬기로 지형 정찰을 빈번하게 다니던 와중 세 번이나 격추당했지만 살아남았다. 그는  3회의 베트남 근무 중 두 번째 은성훈장과 우수비행십자훈장, 우수근무십자훈장 등을 수여 받았다.

귀국 후 준장을 거쳐 1970년에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아버지인 패튼 장군이 2차대전 발발 직전에 이끌었던 제 2 기갑사단장을 지냈다. 그는 독일 스투트가르트의 미 제 7군단 부군단장을 마지막 보직으로 받았는데, 이때 스투트가르트에 살던 에르빈 롬멜(Erwin Rommel, 1891~1944) 원수의 아들인 만프레드 롬멜(Manfred Rommel, 1928~2013)과 친분을 나누었다. 만프레드 롬멜은 훗날 스투트가르트 시장을 지냈다.

패튼 가문은 미국 역사 대대로 군인을 배출한 집안으로, 패튼 4세는 4대째로 미 육군 장교를 지냈다. 초대인 조지 스미스 패튼(George Smith Patton, 1833~1864)은 남북전쟁 당시 남군 대령을 지냈고, 2대인 조지 윌리엄 패튼은 아버지를 기려 이름을 조지 스미스 패튼(1856~1927)으로 바꾸었다. 그는 전쟁에 참전한 적은 없지만, 정치가로 활동하며 미 주 방위군에서 소령까지 진급했다. 3대는 2차 세계대전을 주름잡으며 히틀러로부터 "연합군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라는 말을 듣던 바로 그 패튼 장군이다. 안타깝게도(?) 패튼 4세의 세 아들들은 군인의 길을 걷지 않았으며, 막내 아들인 벤자민 패튼(Benjamin Patton, 1965~)은 작가 겸 영화 제작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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