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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베트남전쟁사

[1962] 전선 없는 베트남에서 목숨을 걸고 부상자를 돌본 간호장교단

라마막 2023. 4. 19. 13:54

베트남 전쟁 중 활동한 미군 간호장교의 모습.

베트남 전쟁 중 여성의 간호사 역할은 부상병 치료에 있어 핵심적이었다. 1960년대는 아직 여성이 군에서 활동하기에는 제약과 차별이 컸던 시기지만, 이들은 애국심 하나로 죽음이 도처에 만연한 이역만리의 전장까지 가 이 곳에서 부상을 입고 병든 병사들을 치료했다.

베트남 전쟁 기간 중 복무한 여군 간호 인력은 7,000명에 달한다. 이들은 총을 쥐고 전선에서 싸운 것은 아니지만 "전선" 구분이 없던 베트남의 정글 속에 임시로 차려진 야전병원 천막 아래에서 분투했다. 이들에겐 항상 자원이 부족했고, 의료 장비나 의약품도 모자랐다.

이들 간호 인력은 전장 위에서 의료 활동 뿐 아니라 원거리까지 원정을 와 정신적으로 지친 병사들의 심리 상담까지 병행했다. 이들은 미군 의무병과의 중추였으며, , 분 단위로 병사들이 죽어나가던 와중에 수많은 병사를 살려낸 핵심 전력이기도 했다.

이들은 남성 위주인 '전투 병력'들에게 차별을 받거나 성추행을 당하기도 했으나, 그 상황 속에서도 대부분의 간호장교들은 임무에 집중하며 치료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돌보았다.

베트남 전쟁에 투입된 미군 전체 병력은 1963~1969년 기간으로만 한정해도 550,000명에 달한다. 미군이 본격적으로 대규모 의무병과를 투입하기 시작한 시점은 1962년 초였으나, 당시 간호 인력은 미국 국내에서도 부족했던 시기이므로 육군 간호병과(ANC: Army Nurse Corps)나 해군 간호병과(NNC) 역시 정원을 채우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육군과 해군이 초기 파병 간호 인원을 모집했을 때 목표 정원에 비해 2,000명 이상이 부족했다.

이에 미 국방부는 '나이팅게일 작전(Operation Nitingale)'을 실시해 간호 인력을 충원하기로 했으며, 주로 고등학교와 전문대학, 직업소개회 등을 중심으로 필요 인력을 모집했다. 뿐만 아니라 라디오와 TV 광고를 병행했으며, 일부 현역 간호장교를 차출하여 리크루팅 활동에 투입하기도 했다. 비록 당시 TV에서는 베트남 전쟁의 참혹상이 매일 방송으로 전파를 타고 있었으나, 미 육군은 간호장교 모집을 하면서 이런 부분 보다는 "로맨스와 모험, 기회"라는 세 요소에 중점을 두었다. 미군은 2차 세계대전 이래 간호장교가 현역 신분으로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이런 '홍보 포커스'에 따라 현역의 결혼 금지 규정을 철폐했다. 동시에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문구를 활용하면서 "모험심"을 자극했고, 간호장교 복무 후 얻게 될 혜택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베트남 전쟁에 간호장교로 참전한 여성의 평균 나이는 23세였다. 당연히 일부는 갓 스무 살에 불과하기도 했고, 또 일부는 40세를 넘긴 이도 있었다. 지원자 대부분은 간호학교를 갓 졸업한 인력이었고, 이들 중 오로지 35% 정도만이 1년 이상 일반 병원에서 실무 경력이 있었다. 매일 베트남 전쟁의 참상이 방송되던 이 시점에 목숨을 걸고 월남 파병 간호장교를 지원한 이들은 순전히 '간호사'로서의 직업적 도전 정신과 호기심, 그리고 애국심에 기인한 바가 컸다.

미 육군 간호병과단은 당연히 대부분 여군으로 채워져 있었으나, 20% 정도는 남군 간호사들이었다. 미 육군은 이미 1955년부터 간호병과에 남성 간호사를 받고 있었으며, 미 해군 역시 1965년부터 그 뒤를 이었다.

이들 간호장교는 전투 지원(CS: Combat Support) 인원으로 직접적인 전투 인력이 아니었지만 전선 구분이 없던 베트남에서 안전한 지역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의무 후송에 사용된 트럭은 항상 수류탄 파편으로 유리창이 깨져 있거나 총알 자국이 나 있었고, 의무후송차량이 달릴 땐 아무리 더워도 유리창을 열지 못하도록 규정으로 막았다. 지나가던 베트콩이 열린 창으로 수류탄을 던져 넣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간호장교들은 부상을 입은 병사들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오폭에 부상을 입기도 했고, 부비트랩에 걸려 사망하기도 했다. 야전병원이나 의무시설은 국제적으로 비()교전대상으로 인정받았지만, 이 곳에서는 '모든 미국인'은 위험요소이자 공격 대상일 뿐이었다.

베트콩의 직접 공격으로 전사한 유일한 여군 간호장교는 196968일에 전사한 샤론 레인(Sharon Lane) 중위 한 사람 뿐이다. 하지만 부비트랩 등에 의한 부상으로 치료 중 사망하거나 현지 질병으로 순직한 간호장교는 일곱 명이다. 그나마 사망자 수가 적은 이유는 이들이 1차적인 전투 병력이 아닌데다 미 육군 간호장교단에서 이들의 베트남 근무 기간을 1년 미만으로 제한했던 영향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간호장교들은 짧은 근무기간 때문에 전장에 유경험자가 적어 일이 돌아가지 않는 상황을 우려하여 2~3회 추가 근무를 신청하여 3년 넘게 베트남의 정글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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