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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1970] 영춘권의 두 대가(大家), 엽문과 이소룡

라마막 2022. 12. 14. 22:23

영춘권(詠春拳)의 두 대가, 엽문(葉問, 1893~1972)과 이소룡(본명 이진번[李振藩], 1940~1973). 1970년대에 촬영된 사진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촬영시기는 미상이다. 디지털 채색=Jecinci

 ◎ 엽문*은 중국 포산(佛山) 난하이현(南海縣) 태생. 집안이 부유했으며, 진화순(陳華順, 1836~1909)에게 사사해 영춘권에 입문했다. 하지만 영춘권 입문 당시 진화순이 이미 노령이었으므로 얼마 안 가 사망했으며, 대신 진화순의 제자인 오중소가 뒤를 이어 그를 가르쳤다. 그는 16세에 광동(廣東)성-홍콩(香港)으로 가 사립학교를 다녔으며, 이 곳에서 스승 진화순의 선배 아들인 양벽을 만나 영춘권을 마저 배웠다. 엽문은 24세에 고향 포산으로 귀향하여 중화민국 국민정부에서 경관이 되었으며, 중일전쟁이 끝난 뒤에도 계속 경관 일을 했으나 1949년 국공내전에서 공산군이 승리하자 국민정부 밑에서 일했던 경력 때문에 해를 입을까 우려해 홍콩으로 피신했다. 

 이 곳에서 본격적으로 무술 도장을 연 그는 초반에는 경영난으로 고전했으나 얼마 뒤부터 제자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으며, 이 영춘권 수련자들이 타 무술가들을 꺾으면서 엽문 역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제자들과 '영춘체육회(詠春體育會)'라는 단체를 설립해 운영했으며, 그 제자 중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훗날 '절권도'를 창시한 이소룡도 있었다. 

 영화에서 묘사된 것과 달리 그는 홍콩에서 영춘권을 지도하면서 살다가 1972년 인후암으로 사망했다. 제자 중 하나는 그가 아편을 꾸준히 피웠다고 폭로한 적이 있으며, 그가 겪던 재정난도 상당 부분 이 아편 사용으로 야기됐다고 주장했다. 


◎ 이소룡, 본명 리준판(이진번)은 홍콩과 미국의 무술가이자 영화배우였다. 부친인 이해천(李海泉, 1901~1965) 역시 홍콩의 경극 배우이자 가수였으며, 미국에서 공연 중 만난 그레이스 호(Grace Ho/何愛瑜, 1907~1996)와 결혼하여 이소룡을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의 한 병원에서 낳았다. 이 때문에 그는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었으나 생후 3개월 만에 홍콩으로 귀국했다. 

 이소룡은 어려서 홍콩에서 거주하다가 스승인 엽문을 만나 사사했으며, 영춘권을 수련했다. 하지만 19살이 되던 해에 폭행 사건에 휘말렸다가 사람을 크게 다치게 해 경찰에 연행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소룡의 신변을 우려한 부친은 아들을 미국으로 보내기로 했으며, 이소룡은 $100달러 한 장만 갖고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하지만 곧 시애틀로 간 그는 아버지의 친구인 루비 초우(Ruby Chow) 밑에서 지냈고, 이 곳에서 에디슨 기술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워싱턴 주립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에 진학하여 철학과 연극을 전공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무술에도 집중하여 다양한 무술을 수련했으며, 훗날 이 시기에 수련한 소림 홍가권, 공력권, 가라데 뿐 아니라 태권도까지 녹여낸 '절권도(節拳道)'를 창시했다. 

 그는 대학 재학 중 아내 인 린다 에머리(Linda Emery, 1945~ / 현재의 린다 리 캐드웰[Linda Lee Cadwell)와 만나 결혼했으며, 1964년까지 무술 연마만 했으나 이 해 롱비치(Long Beach) 가라데 대회에서 시범으로 나갔다가 배우 윌리엄 도지어(William Dozier)의 눈에 띄어 TV 시리즈인 《그린 호넷(The Green Hornet)》에 캐스팅 돼 '가토(Kato)' 역을 맡았다.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1966년~1967년 한 시즌을 끝으로 조기종영했으나, 이소룡이 향후 영화배우로 커리어를 잡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이 시기에 그는 당시 가라데 챔피언이던 훗날의 영화배우 척 노리스(Chuck Norris)와 만났으며, 그 인연으로 함께 영화도 촬영했다. 

이소룡은 이후 미국에서 영화 조연으로 주로 출연했으나 '동양인이 영화에 나오기엔' 아직 정서가 받쳐주지 않는다고 판단해 홍콩으로 귀국했다. 그는 골든 하베스트(Gonden Harvest)사의 추문회(鄒文懷, 레이먼드 처우)와 만나 영화 출연 제안을 받았으며, 1971년 《당산대형(唐山大兄, The Big Boss)》로 데뷔해 사실상 홍콩 '무술영화' 시대를 열었다. 이후 그는 《정무운(精武門, 1972)》과 《맹룡과강(猛龍過江, 1972)》에서 주연을 맡아 잇다라 흥행을 성공시켰으며, 무술 영화의 가치를 알아본 미국의 워너 브라더스(Warner Brothers)가 골든 하베스트에 공동제작 제안을 하면서 《용쟁호투(龍爭虎鬪, Enter the Dragon, 1973)》의 주연으로 캐스팅됐다. 이 영화에서 그는 세계 시장을 노리고 '이소룡'이라는 이름 대신 '브루스 리(Bruce Lee)'라는 이름을 전면에 내세웠다. 용쟁호투는 전세계에서 $2억달러 수익을 올려 제작비 $85만 달러를 크게 웃돌았으며, 이 작품을 바탕으로 《더블 드래곤(Double Dragon)》이라는 게임까지 등장했다. 

이소룡은 《사망유희(死亡遊嬉, the Game of Death)》 각본을 직접 쓰고 연출까지 맡았으며, 약 40분 분량을 실제로 촬영했으나 이 해에 문제의 급작스러운 사망사고로 영화 촬영이 중단됐다. 이후 감독인 로버트 클라우스(Robert Clouse)는 이소룡이 사전에 촬영한 다른 영화의 여분 필름을 이용하여 '사망유희'를 완성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최종작 <사망유희>는 이소룡이 촬영한 40분 분량에서 15분 정도만 썼으며, 나머지 23분 가량의 영상은 2000년 10월에 제작된 다큐멘터리 《브루스 리: 전사의 여정(Bruce Lee: A Warrior's Journey)》에 담겼다.

그는 1973년 7월 20일, 대만계 영화배우 베티 팅 페이(Betty Ting Pei, 丁珮, 1947~)의 집에서 사망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이미 1973년 5월 10일, <용쟁호투> 촬영 중 쓰러져 병원으로 긴급 후송됐으며, 이 당시 뇌부종이 발견되었지만 마니톨 처방으로 위기를 넘겼다. 2개월 뒤인 1973년 7월 20일, 그는 배우 조지 라젠비(George Lazenby, 1939~)와 저녁 약속을 잡은 후 골든 하베스트 대표인 추문회, 베티 페이와 함께 만나기로 했다. 이들은 베티 페이의 집에서 영화에 대해 논의하다가 초우가 먼저 자리를 떴으나, 이소룡은 두통을 호소했기 때문에 소파에 길게 누웠다. 베티는 아쿠아제식을 이소룡에게 건네주었으며, 그는 7시 30분경 약을 복용하고 잠들었다. 

저녁 식사가 끝날 때까지 이소룡이 오지 않자 추문회는 다시 베티 페이의 집으로 돌아왔고, 두 사람은 이소룡을 깨웠으나 인사불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뒤늦게 의사를 불렀다. 하지만 의사도 소생에 실패하자 인근 퀸 엘리자베스 병원으로 이소룡을 긴급 후송했으나, 그는 병원 이송 중 사망이 선고됐다. 

사인에 대해서는 이쿠아제식 알레르기, 혹은 부검 시에 나온 미량의 대마초 때문에 마약 원인설이 돌았으나 추문회는 그가 '평소 무술로 인한 통증 때문에 의료용 진통제 목적으로 소량 썼을 뿐'이라고 밝혔다. 최근 밝혀진 한 연구에 따르면 결국 뇌부종이 발생한 상황에서 다량의 물을 복용한 것이 문제가 됐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남은 가족으로는 아내 린다 리 여사가 있으며, 아들 브랜든 리(Brandon Lee/李國豪, 1965~1993)는 영화 <크로우(Crow, 1994)> 촬영 중 불과 2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그는 상대방이 겨눈 총구를 막은 상태에서 상대방이 방아쇠를 당기는 장면을 촬영하다가 사망했는데, 결국 영화는 그의 사후 CG를 동원해 마저 촬영했으며, 제목에는 그를 추모하는 의미로 <브랜든 리의 크로우(Brandon Lee's the Crow)>로 명명했다. 그는 사후 아버지 곁에 묻혔다. 

그 외에 딸인 섀넌 리(Shannon Lee, 李香凝, 1969~)가 생존해 있으며, 역시 배우이자 연출가로 활동 중이다. 슬하에 딸인 렌 키슬러(Wren Keasler, 2003~)가 있다. 


* 참고로 국립국어원의 표기법에 따르면, 신해혁명(1911)을 기준으로 이전에 태어난 중국인은 한국어 발음으로, 이후에 태어난 이는 원어 발음을 존중하도록 하고 있다. 즉, 엽문은 "엽문"이라고 그대로 읽어도 되나 이소룡은 "리사오룽"으로 읽어야 하는 것. 하지만 영화 등을 통해 "엽문, 이소룡"이 일반적으로 통용되어 왔으므로 예외로 보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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