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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10. 9] 공산혁명가 체 게바라, 볼리비아에서 체포 후 처형

라마막 2022. 12. 15. 12:00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의 생전 모습.

1967년 10월 9일,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Ernest "Che" Guevara, 1928~1967)가 볼리비아의 라 이게라(La Higuera)에서 처형당했다.

남미의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를 자처한 그는 쿠바 혁명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으며,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 1926~2016)가 쿠바의 독재자로 등극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그는 통칭 '7.26 혁명'으로 풀젠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1901~1973) 대통령을 축출했으며, 곧 쿠바에 전체주의 공산국가를 수립했다. 게바라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의 단초가 된 소련 미사일을 쿠바로 끌어온 인물이기도 하다.

체 게바라는 3년 후 쿠바를 떠나 아프리카와 남미 등지를 돌며 계속 공산주의 혁명을 주도했으나, 결국 CIA의 추적을 받아 볼리비아의 발레그란데(Vallegrande) 주에서 체포 당한 뒤 볼리비아군에게 처형당했다. 볼리비아의 라 이게라 시는 1997년 게바라의 동상을 세웠다.

그는 사후 공산-사회주의 진영에서 전세계 공산주의 혁명의 "희생자"로 추앙 받아왔다.

: 아이콘 같은 사진 때문에 유명한 인물이나, "실제" 인물에 비해 미화가 많이 이루어졌다는 비판도 항시 따라다닌다.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 로사리오 태생이며, 스페인 바스크-아일랜드계 이민자 가족으로 아르헨티나 정착에 성공한 상류층 집안의 다섯 아이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스페인 내전 중 스페인 공화국군 지지자였으므로 전쟁 참전용사를 집으로 자주 불렀는데, 이 때문에 체 게바라도 어려서부터 넓은 범위의 정치 스펙트럼에 노출됐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천식이 심했지만 운동을 좋아했기 때문에 서서히 극복해 수영, 풋볼, 골프, 사격 등에 능숙해 졌고, 특히 성년기에도 내내 사이클 타기를 즐겼다. 집안의 지원으로 의과대학에 진학한 게바라는 모터사이클로 남미 여행을 시작했으며, 그 과정에서 남미 자체에 만연했던 극단적 빈부격차와 빈곤층의 생활상을 목격했다. 특히 그는 이 여행을 통해 남미의 문제는 '자본주의의 착취'라고 판단해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들게 되었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그가 특히 반미성향을 갖게 된 것은 과테말라의 하코보 아르벤스(Jacobo Arbenz, 1913~1971) 대통령이 사회개혁을 추진하면서 유나이티드 프룻 컴패니(United Fruit Company: UFC)가 갖고 있던 잉여 농지를 토지배분 하려 하자 UFC가 미국에 로비를 하면서 아르벤스 정부가 전복되는 것을 보면서부터 였다. 그는 멕시코에서 피델 카스트로와 라울 카스트로(Raul Castro, 1931~)를 만났으며, 여기서 7.26 혁명을 계획해 쿠바로 향했다. 이들은 이 곳에서 바티스타 정권을 목표로 게릴라전을 시작하면서 사실상 게릴라 측의 2인자로 급부상했다.

바티스타 정권은 2년 뒤 전복됐으며, 게바라는 곧 산업부장관에 국립은행장, 쿠바 군 감독관 등을 겸직하면서 쿠바를 공산화시켜 "갈아엎는" 작업을 시작했다. 특히 이 시기에 그는 게릴라 전 중 카스트로 진영이 '전쟁 범죄자'라고 지목했던 바티스타 정권 인사들을 심판하여 총살대로 끌고가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3년 뒤 주로 제3 세계를 돌며 반 제국주의, 반 식민주의, 반 자본주의 독점체제를 기치로 아프리카와 제3세계권을 돌았으며, 1차로 아프리카 콩고(킨샤샤 정부)로 가 공산혁명을 부추겼으나 실패로 끝났다. 아프리카권을 돌던 그는 다시 남미로 돌아와 활동을 시작했으나, CIA의 지원을 받은 볼리비아군이 그를 곧 체포해 처형했다.

게바라의 체포는 특히 쿠바 망명자 출신으로 CIA 특별요원이 된 펠릭스 로드리게즈(Felix Rodriguez, 1941~)의 공이 컸다. 그는 볼리비아 현지인들과 협조하여 1967년 10월 7일에 게바라의 위치를 포착했으며, 10월 8일 오전에 주변지역을 2개 소대로 포위했다. 게바라는 총격을 가하며 저항했지만 곧 체포되었고, 당시 기록에 따르면 게바라는 쓸모 없어진 총을 집어던진 뒤 병사들에게 손을 들고 나오면서 '쏘지 마시오! 내가 체 게바라요! 아마 나를 산채로 잡는게 죽이는 것보다 훨씬 값어치가 높을 거요!'"라고 외쳤다.

그는 10월 8일 오전에 라 이게라로 끌려갔으나 볼리비아군 장교의 심문을 거부했으며, 계속 병사들에게 뭐라고 하면서 부추기는 것 같아 보였다고 한다. 게바라는 질문에는 대부분 대답을 거절했으며, 중간 중간에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둘러보며 계속 담배를 찾았다. 이에 하이메 니노 데 구즈만이라는 한 장교가 연민을 느껴 그에게 담배를 하나 주었고, 그제사 웃으면서 감사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튿날에도 계속 협조를 거부하던 그는 호라시오 우가르테셰라는 볼리비아 군 해군 준장이 직접 찾아와 심문을 시도하자 그에게 침을 뱉었다. 볼리비아 정부는 게바라의 거취를 놓고 고민했으나, 레네 바리엔토스(Rene Barrientos, 1919~1969) 대통령이 10월 9일 오전에 게바라의 처형을 명령했다. 사실 이 결정은 다소 의외였는데, 당시 미국 정부는 게바라를 더 취조할 목적으로 그를 파나마로 이송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체포 후 촬영된 체 게바라.

게바라의 즉결처형이 결정되자 27세의 마리오 테란이라는 한 병장이 나서서 형 집행을 자원했다. 그는 중대원 중에 "마리오"라는 이름을 가진 다른 두 명과 친했는데, 두 명 모두 며칠 전 게바라의 게릴라와 싸우다가 전사했기 때문에 전우들의 원수를 직접 갚고 싶어했다. 볼리비아 군은 테란을 집행자로 세웠으나 "얼굴에는 쏘지 말고, 최대한 교전 중에 이미 상처를 입은 부위 쪽으로" 쏠 것을 명령했다.

곧 게바라는 끌려나와 마지막으로 한 차례 더 심문을 받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곧 볼리비아 병사들은 마지막으로 그와 사진을 촬영했으며, 게바라는 곧 작은 곳간 안으로 끌려간 뒤 테란 병장에게 처형됐다. 그는 테란이 방 안으로 들어오자 마지막으로 "네가 나를 죽이러 왔구나! 그래, 쏴봐라 겁쟁아! 그래봤자 사람 하나 죽이는 것에 불과해!!"라고 외쳤다고 한다.

1967년 10월 11일, 미측의 비공개 메모에 따르면 당시 보고를 받은 미국의 린든 존슨(Lyndon B. Johnson, 1908~1973) 대통령은 월트 로스토우(Walt Rostow, 1916~2003) 국가안보보좌관으로부터 게바라 처형 소식을 들은 뒤 "바보같은... 하지만 볼리비아 쪽 입장에서 보면 이해할 만 하군"이라고 읊조렸다고 한다.

'의사'를 포기하고 혁명을 택했다는 점 때문에 그는 남미권 '체 게바라 열풍'을 몰고왔으며, 남미 공산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그의 활동이 궁극적으로 남미의 빈부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더욱 더 격차를 조장했고, 심지어 그가 쿠바, 콩고, 볼리비아에서 '혁명'을 한다면서 대대적으로 게릴라전을 벌인 것이 애매한 국민, 특히 농민층을 분쟁에 끌어들여 희생시켰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쿠바 혁명 후의 행적도 논란의 대상인데, 그는 금융에 문외한이면서 카스트로 정부의 국립은행 총재로 취임해 쿠바 경제의 혼란을 몰고와 금융불안을 야기하는 등 행정가로써는 무능한 면을 보이기도 했다.
 
 
또한 "서민을 위하는" 숭고한 이미지와 달리 명품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당시 쿠바의 동료들이 그를 "아바나 백작"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는 설도 존재한다. 그의 사후 12,000달러의 현금과 고급 롤렉스 시계를 항시 휴대하던 것도 논란이 됐는데, 카스트로 정부는 그것이 '유사시를 위한 혁명 군자금과 정확한 전투 시간 판단을 위한 시계였을 뿐'이라고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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