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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7.] '라마단 작전' 중 격파당한 이란군 치프틴 전차

라마막 2023. 8. 24. 15:15

이란-이라크 전쟁 중인 1982년 바스라(Basra) 외곽에서 격파당해 정차한 이란 육군의 치프틴(Chieftain) 전차와 전차병의 시신.

: 바스라 전투는 이란군이 실시한 공세작전인 "라마단(Ramadan)" 작전의 일부로, 이란 측은 공세 세력을 3개로 나눈 후 이라크 군을 포위 공격했다. 이 전투는 1982713일부터 개시되어 6주 이상 지속됐다. 라마단 전투는 2차 세계대전 이래 보병 전력 만을 밀어붙여 "인해(人海)"로 공격한 사실상의 최대 규모 전투로 기록되기도 했다.

이미 1982년 중반까지 이란군은 이라크를 대부분 영토 밖으로 축출하여 1980년 개전 시 잃었던 영토를 대부분 회복했다. 승리 가능성이 사실상 사라졌다고 본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 1937~2006)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으로 침공한 1차 레바논 전쟁이 발발하자 팔레스타인을 지원해야 한다는 핑계로 종전을 시도했으나, 이란 측의 사이예드 루홀라 호메이니(Seyyed Ruhollah Khomeini, 1900~1989)는 후세인의 강화 제안을 거부하고 이라크 영내로 역습을 시작했다.

사실 이란이 이라크 영내로 역습하는 "확전"에 대해서는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 이미 2년 넘게 싸우면서 불필요한 소모전 양상이 된 데다, 이슬람 국가끼리 계속 싸우는 모습도 주변 이슬람 국가들이 불편하게 받아 들였다. 하지만 일단 같은 이슬람 권이지만 시아파-순니파 대결 양상이 된 데다 승기를 잡은 상황이었으므로 독전파 쪽에 힘이 실리게 되고 말았다. 이에 이란은 당시 인기 혁명 구호였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은 이라크의 카르발라를 통한다"는 말을 달성하기 위해 최소한 이 도시까지 점령한 상태로 종전하고 싶어했다.

이에 이란 측은 19827, 이라크로 역습을 개시해 카르발라까지 돌파할 목적으로 역습 준비에 들어갔으며, 마침 작전이 라마단 단식기간과 겹쳤기 때문에 작전명도 "라마단"으로 정했다.

전투가 시작되자 이란은 10만 병력의 이란 혁명수비대와 바시즈 민병대를 투입해 이라크 군 요새화 진지를 공격했다. 이라크 군은 벙커에 숨어 야포와 기갑 전력으로 방어에 들어갔다. 병력은 이라크 군 쪽이 더 많은 상황이었으나 이란은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전술을 취했다. 이란 군은 기갑 전력으로 일단 공세를 시작한 뒤 그 뒤를 따라 바시즈 민병대가 인해 전술로 이라크 측을 몰아붙이는 방법을 썼다. 물론 아무런 방호없이 뛰어드는 이들 민병대는 이라크 군의 야포와 전차포가 쏟아져 돌격 과정에서 녹아 없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 수로 밀어붙인 이란의 전술이 잠시 먹혀들어 이란의 방어선이 일시적으로 돌파 됐으나, 곧 정신차린 이라크 역시 항공지원과 화학무기를 대량 투입하면서 다시 이란군을 원점으로 밀어냈다. 이번에는 쌍방이 헬기를 동원하면서 헬기 간 전투가 벌어졌지만 이 단계까지 이란의 공세는 생각만큼 큰 효과를 내지 못했고, 이란 측이 곧이어 다시 한 번 병력을 모아 집중 공세를 실시했으나 전투가 종료될 때까지 얼마 되지 않는 영토와 맞바꿔 대규모의 사상자만 야기하고 말았다.

이란의 공격 템포가 떨어지자 이라크 군은 기갑전력을 밀집시킨 후 역습을 준비했다. 이라크 측은 먼저 이란이 최후의 공세를 가해오자 집중된 전력으로 이를 격퇴했으나, 동시에 자신들이 입은 피해도 어마어마 했으며, 9기갑사단의 경우는 말 그대로 녹아 없어진 수준이 되어버려 앞서 계획한 역습도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결국 쌍방 모두 더 이상 공세를 취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않자 전투는 자연히 종결되었다.

하지만 전투 후 실시한 피해 평가에서 더 큰 타격을 입은 것은 이란 측으로 판명됐다. 이란 군은 기갑 자산을 대량으로 잃었을 뿐 아니라 공세능력이 심하게 손상된 반면, 이라크 측은 전투 전에 구축한 강화 진지를 중심으로 싸운 덕에 생각만큼 타격이 크지 않았다.

이란은 전쟁을 승리로 종결시킬 가능성이 큰 이 '라마단' 전투에서 패하자 이후 수 차례 공세를 반복했다. 하지만 종전까지 이란은 어마어마한 병력 피해만 야기했을 뿐, 실제로 얻은 영토는 미미할 수준으로 얼마 되지 않았다. 이 라마단 작전은 이란 군 지휘부의 전술 실패로 평가 받는다.

단 이틀 간의 전투로 이라크는 5천명이 전사하고 1,000명의 포로가 발생했지만, 이란 군에서는 2.5배에 달하는 12,000명이 전사했다. 전차 역시 이라크는 150대 가량이 파손된 반면 이란은 두 배인 300대 이상이 격파 당했다. 무엇보다 이 전투를 통해 이란 측은 지휘/통제 및 근접항공지원, 군수 전체에 걸쳐 문제가 많다는 점이 노출됐다.

이후에도 호메이니는 후세인이 제시한 강화안을 수차례 거절했으며, 명예 회복을 위해 여러차례 이라크 영토로 역습을 실시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채 희생자만 양산하다가 종전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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