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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12. 20] 미국, 파나마 침공 전격 단행...'저스트 코우즈' 작전 개시

라마막 2022. 12. 21. 01:10

노리에가 정권 전복을 위해 파나마를 전격 침공한 미군을 환영하는 파나마 시민.

1989년 12월 20일, 미국의 파나마 공습 작전인 '저스트 코우즈(Just Cause)' 작전이 시작됐다. 조지 부시(George H. W. Bush, 1924~2018) 대통령의 재가로 미군이 직접 중미의 소국 파나마로 투입된 이 작전은 수년간 지속된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Manuel Noriega, 1934~2017)와 미국 간 긴장의 결과였다.

1989년 12월 16일, 파나마 주둔 미 해병 병사 한 명이 파나마 방위군(PDF: Panamanian Defense Force)에게 검문을 받던 중 사살 당했다. 노리에가는 이 사건 직후 미국과 파나마는 전쟁 상태임을 선언했으며, 부시 대통령은 파나마의 미국인 목숨이 위협을 받고 있으므로 즉각 침공을 단행한다고 응수했다.

사실 이 배경에는 노리에가가 사실상 중미의 마약 중계기지 노릇을 하면서 남미에서 미국으로 흘러드는 마약 트래픽(traffic)의 핵심 중계지 노릇을 하고 있다는 점이 작용했다. 이 작전은 1945년 2차세계대전 종전 후 냉전과 관계 없이 미국이 단행한 첫 전쟁이었다.

저스트 코우즈 작전은 1990년 1월 31일에 종료했으며, 노리에가는 체포되어 플로리다 주에 수감됐다. 국제연합 총회(UNGA: 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는 미국의 침공을 비난했으며, 국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사실 반전은 마누엘 노리에가의 정체로, 그는 남미 친미계 반군에게 무기를 공급하던 미 해외정보기관(CIA)에 협력한 인사였으며, 실제로 CIA로부터 급여를 일부 받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17년 5월 29일에 사망했다.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 장군. 권력을 잡은 그는 총선 후 권력을 이양했어야 하나, 선거 과정을 트집잡으며 민간에 권력 이양을 거부하고 있던 독재자였다.


: 잘 알려졌듯 미국과 파나마의 관계는 다소 미묘한데, 우선 파나마 운하지대(Panama Canal Zone)은 1903년 헤이-부노-바릴라(Hay-Nunau-Varilla) 협정에 따라 미국이 임대 형식으로 운영했으며, 1979년 운하지대를 철폐한 뒤에는 토리호스-카터(Torrijos-Carter) 협정에 따라 1999년까지 미국이 관리한 뒤에 반환하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따라서 파나마에는 이 운하지대 보호를 위해 미 해병대가 상설 파견되어 있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노리에가와 오랫동안 함께 일해왔다. 그는 1967년부터 CIA 해외 정보원으로 급여를 받았으며, 조지 부시 대통령이 CIA 국장을 지내던 시절(1976~1977)에도 활발하게 미국에 협력했다. 그는 당시 중미가 소련에 친화적인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국 편을 들었으며, 니카라과의 좌파 계열 산디니스타 정부나 엘 살바도르의 FMLN 같은 좌익 혁명 세력에 적대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그 뒤로 그는 1960년부터 CIA로부터 연 $10만 달러를 받았고, 1980년에는 권력자가 되면서 연 $20만 달러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앞에서는 미국의 마약단속국(DEA)과 협력해 불법 마약 선박의 통과를 통제하는 척 하는 한편, 뒤에서는 마약 카르텔과 손을 잡고 돈 세탁을 자행했다. DEA는 결국 그의 이중 행각을 파악했지만, 워낙 노리에가가 CIA와 특수 관계에 있었으므로 섣불리 건드리기 어려웠다.

1980년대 중반,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1911~2004)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레이건이 노리에가와 퇴진 협상을 시작하기를 원하자 그는 미국에 적대적이 됐고, 뉴욕타임즈 등에 통칭 '이란-콘트라' 스캔들의 도화선이 될 정보를 던져주었다. 이에 레이건은 미국 법원에 그를 마약 범죄 혐의로 기소하면서 압박했지만, 이것이 실질적인 위협은 아니었으므로 노리에가는 여전히 레이건과 협상을 거부했다.

미국은 이에 파나마 침공 후 노리에가 축출을 은밀히 고려하기 시작했다. 이 때 결정적인 도화선이 된 사건이 1989년 10월에 발생했다. 이 달 초, 파나마 방위군의 모이세스 지롤디(Moises Giroldi, 1950~1989) 소령이 시도한 2차 쿠데타가 실패하면서 국내 분위기가 험악해져 있었다. 그러던 중 네 명의 미 해병대 장교가 파나마 방위군 본부 인근에서 오후 09:00시 경 검문에 걸렸다. 이들은 퇴근 후 파나마시티의 매리어트(Marriott)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하러 가던 길이었으며, 미 국방부는 이들이 비 무장상태에 사제 차량임을 확인해주었으나 파나마군 병사들이 적대적으로 나왔다.

이들은 미군 병사들이 무장하고 있고 정찰 임무를 수행하러 가는거라 매도했다. 결국 검문 과정에서 쌍방이 충돌하면서 총격전이 시작됐고, 그 과정에서 미 해병대의 로버트 파즈(Robert Paz) 중위가 치명상을 입었다. 나머지 미 해병 장교들은 파즈 중위를 태우고 인근 병원으로 달렸지만 그는 병원에 도착하자 곧 사망했다. 뿐만 아니라 사건이 벌어지는 것을 인근에서 목격한 미 해군 네이비 실(Navy SEAL) 소속 애덤 커티스(Adam Curtis) 중위와 아내는 파나마 군에게 구금 당했을 뿐 아니라 커티스 중위는 구금 중 폭행 당하고 아내는 성추행을 당했다.

이에 조지 부시 대통령은 파나마 침공을 결심했으며, 12월 20일 01:00을 작전 개시 시간으로 지정했다.

작전에는 미 제 18공정군단 예하 82공정사단, 7경보병사단, 7특수전단(공정), 75 레인저 연대, 합동 특수전 특임대, 미 해군 네이비 실 4팀(Team Four) 등이 대거 투입됐으며, 투입된 총 병력은 약 16,000명이었다. 이 전투는 일방적으로 진행되면서 미군이 '신형 무기 체계의 테스트베드'로도 활용했다. 미 제 37전술전투비행단은 당시까지 베일에 가려있던 '스텔스' 폭격기인 F-117A 나이트호크(Nighthawk)를 투입했고, AH-64 아파치(Apache) 공격헬기 역시 이 곳에서 처음 데뷔전을 치렀다. 전자전기인 EF-111A는 레이더 재밍 기술로 파나마 군 통신을 무력화했으며, AC-130 건십(Gunship)도 파나마 하늘에서 맹활약했다.

미군은 전략적 거점인 푼타 파이티야(Punta Paitilla) 민간 공항을 점령한 후 파나마군 병영과 리오 하토(Rio Hato) 활주로를 장악했다. 네이비 실 4팀은 노리에가의 개인 제트기와 건보트를 파괴해 도주 수단을 없앴으며, 노리에가에게 스파이 혐의로 잡혀있던 커트 뮤즈(Kurt Muse)가 구금되어 있던 카르셀 모델로(Carcel Modelo) 교도소를 급습해 그를 구출했다.

불타는 파나마 시내의 모습.


미군은 20일 하루 동안 주요 거점 대부분을 장악했으며, 파나마 방위군 지휘통제시설도 완전히 마비 시켜 파나마군을 사실상 무력화했다. 그 와중에도 노리에가의 지지자들이 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실시했으나 이 또한 시간문제였을 뿐이다. 작전 개시 수 시간 뒤 같은 해 초 전국 선거에서 승리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선거 무효로 취임하지 못하고 있던 기예르모 엔다라(Guillermo D. Endera, 1936~2009)가 포트 클레이턴(Fort Clayton)에서 대통령 취임 선서를 하면서 노리에가를 압박했다.

네이비 실은 '니프티 패키지(Nify Package)' 작전을 개시해 노리에가의 탈출로를 차단했다. 이미 개인 제트기와 보트를 파괴한 네이비 실은 어디론가 숨어버린 노리에가를 찾기 위해 결국 집집마다 수색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고, 그의 목에 $1백만 달러 현상금을 걸었다. 이 때 노리에가는 파나마시티에 있던 교황청 대사관으로 달려가 바티칸(Vatican) 시국 망명을 타진하고 있었다. 하지만 교황청 측이 이에 끝까지 응하지 않자 결국 노리에가는 1990년 1월 3일자로 미 정부에 항복 의사를 전달한 뒤 미군에 항복했다.

항복 직후 미 DEA(Drug Enforcement Agency) 요원에게 체포되어 MC-130E를 타고 미국으로 송환되는 노리에가. 이후 그는 미국-프랑스-파나마 감옥을 전전하다가 2017년 뇌수술 두 달 만에 파나마에서 사망했다.


노리에가는 항복하자마자 MC-130E 컴뱃 탤런(Combat Talon I) 항공기에 태워져 미국 마이애미로 이송 됐으며, 마이애미 법정에서 재판을 받은 뒤 40년형을 선고 받았다. 곧장 그는 미국 교도소에서 수감 생활을 시작했으나 '모범수'로 인정되어 17년 만에 형기가 끝났다. 하지만 형기가 끝나자마자 프랑스 정부가 범죄인 인도를 요청해 2010년 프랑스 법원에 세워졌고, 이 번에는 자금 세탁 혐의로 7년형을 언도 받았다. 프랑스는 이듬해인 2011년 범죄인 인도 협정에 따라 그를 파나마로 보냈으며, 이 곳에서는 이미 1990년대에 궐석 재판 형태로 그에게 실형을 내려놓은 상태였으므로 곧장 또 수감 생활이 시작됐다.

하지만 2017년 3월에 노리에가의 머리 속에서 뇌종양이 발견됐고, 곧 긴급하게 뇌 수술을 했으나 그는 수술 후 합병 증세로 고생하다가 불과 2개월 만에 사망했다.

전쟁 후 파나마 정부는 엔다라 정부가 들어서면서 파나마 방위군을 해산하고 사실상 경찰력에 가까운 파나마 정부군(Panamanian Public Force: PPF)을 새로 창설해 군대를 완전히 없애버렸다. 이 전쟁으로 약 2만 명의 파나마인이 재산을 잃고 난민이 됐으나 미 정부는 이들에게 $6,500달러씩 보상하면서 새 집을 짓고 이주하게 했다. 작전 중 전사자는 정확하게 집계하기 어려우나 미측은 약 23명이 전사하고 325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파나마 측은 314명이 전사하고 1,908명이 포로가 되었다. 민간인 사망은 집계 단체에 따라 미군은 202명, 시민단체 '아메리카 워치'는 300명, UN은 500명, 중미 인권위원회는 3,000명까지 추산했다.

미국은 파나마 침공 자체가 법적으로 허점이 많았으므로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같은 해인 1990년에 이라크가 쿠웨이트 침공을 단행하자 미국은 곧장 쿠웨이트를 해방하기 위한 '사막의 방패(Operation Desert Shield)' 작전을 실시했고, 중동의 소국 쿠웨이트를 해방하는 성전(聖戰)의 성격을 띄면서 파나마 전쟁에 대한 외부의 비난은 모두 잠재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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