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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4. 29] 美 LA의 흑인 폭동과 '루프탑 코리안' 자경대

라마막 2022. 12. 19. 10:44

통칭 "루프탑 코리안(Rooftop Koreans)"으로 불린 캘리포니아 주 재미교포 자경단원이 코리아타운을 방어 중인 모습. 1992년 로스앤젤레스 흑인폭동 발생 후 이틀 뒤에 촬영된 사진이다.

이 사건은 1992년 3월 3일, LA에 거주하던 흑인이던 로드니 킹(Rodney Glen King, 1965~2012)은 고속도로에서 LA 경찰과 추격전을 벌이다가 체포되었고, 그 자리에서 경찰이 과잉 대응을 하면서 그를 차에서 끌어내 폭행하면서 야기됐다. 이 영상은 4월 29일, 법원에서 재판 중 비디오 영상이 공개되면서 전국으로 방송되어 나갔다.

이에 LA 지역 흑인 공동체가 LA경찰의 과잉 대응에 항의하면서 다수 지역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일어났고, 재판 판결문이 발표된 날부터 폭력성 시위로 변질되면서 LA 지역에 걸쳐 약탈과 폭행, 방화가 자행됐다. LA 경찰은 인력 부족으로 이 폭동 전체를 제압하지 못했으며, 결국 캘리포니아 주 정부는 시위 6일 차에 주 방위군을, 연방 정부는 미군과 정부기관 산하 사법 집행 조직(이를테면 FBI 같은)을 투입했다. 결국 전 도시의 시위는 5,000명에 달하는 진압 인원이 투입되면서 막을 내렸다.

총 일주일 간의 시위 기간 중 2,383명이 부상을 입고 64명이 사망했으며, 체포된 인원은 12,000명에 달한다. 시위는 LA 사우스 센트럴 지역에서 시작했으며, 시위로 소실된 재산 피해액은 $8억 달러에서 $10억 달러로 추산된다. 시위 중 일어난 방화는 3,600건이었으며, 1,100채의 건물이 파손됐으며 이 6일 기간 중 LA 소방서에는 시위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1분 당 한 건의 방화 신고가 접수됐다.

이 기간 중 주로 흑인으로 구성된 시위대는 재미 한국계 교포가 운영하는 가게를 주 타겟으로 삼았는데, 이는 그간 한인계와 흑인 간의 대립 관계도 심했고, 시위의 시작이 된 로드니 킹이 재미교포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폭행 사건을 저질렀다가 체포됐던 점도 영향을 발휘했다. 특히 코리아타운에 접한 부유층 백인 거주지역에 경찰력이 집중되다 보니 상대적으로 코리아타운에 경찰력이 빠지게 된 것도 시위대가 이 곳으로 몰려든 이유 중 하나였다. 사건 후 LA 경찰은 인력과 자원 부족으로 코리아타운을 방어하지 못했다고 해명했으나, 전반적으로는 한인사회의 낮은 위상과 언어 장벽 때문에 우선 보호지역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시위대가 코리아타운으로 본격 약탈을 시작하자 재미교포들은 베트남전 참전용사 중심으로 자경단을 구성하기 시작했으며, 우선 캘리포니아 마켓(California Market) 주인인 리처드 리(Richard Rhee)씨가 약 20명의 무장 경비원을 긴급 고용했다. 다른 상점 주인들도 보유 중이던 글록(Glock) 17, 베레타, 샷건 등을 꺼내 무장했고, 상점가를 중심으로 방어진을 편성했다. 재미교포들이 자체 무장을 시작한 것이 알려지면서 흑인 시위대가 코리아타운을 우회해 쌍방 간에 직접적인 대규모 충돌은 없었으나, 이 과정에서 재미교포 에드워드 송(Edward Song)씨가 우군 사격에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재미교포 사회에서는 이 사건을 4.29 폭동으로 부르며, 코리아타운 자체적으로는 총 $4억 달러의 피해를 입고 2,000개의 상점이 크고 작은 약탈을 당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한인사회 역시 대대적인 이주가 시작되어 새로운 재미교포 거주지가 상대적으로 경찰력의 보호를 받기 쉬운 오렌지 카운티(Orange County) 주변에 형성됐고, LA 외곽의 리버사이드(Riverside)와 샌 버나디노(San Bernadino) 쪽에도 한인 밀집지역이 만들어졌다. 상점 주인들은 이듬해부터 가게 전면 쇼윈도우 유리를 방탄으로 교체했으며, 미 연방수사국 통계에 따르면 바로 다음해부터 재미 한국인들의 총기 구입량이 급증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재미교포 중 PTSD를 겪은 환자가 무려 730명에 달했으나, 캘리포니아 주립대 리버사이드교 내 김영옥 한미연구센터장인 장대한 교수는 4.29 사건이야말로 미국 내 한인 사회의 정체성이 새로 정립된 계기였다고 평가한다. 그간 미국 내 한인 사회는 주류 미국인 사회와 분리되어 있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한인들의 정치권 진출이 늘어났고, "코리아타운"의 폐쇄성이 다소 누그러졌다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게 된 한인사회 역시 민주계와 보수계로 나뉘었으며, 민주계는 한인사회가 LA지역의 소수민족과 연합하여 인종차별과 소수민족의 희생양 이용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반면, 보수파는 미국의 법과 질서를 존중하고, 오히려 한인 사회가 타 소수민족(특히 흑인사회)과 차별화되어 이들보다 위상이 올라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사진촬영=강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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