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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6. 4.] 베이징에서 대규모 민주화 시위 발생

라마막 2023. 6. 4. 06:52
1989년 6월 4일, 중국 베이징의 텐안먼(天安门)에서 일어난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무력으로 진압된 뒤 몇 시간 뒤의 모습. 사진이 촬영된 장소는 텐안먼 광장 앞에서 약 1.5km 떨어진 곳이다.

1989년 6월 4일, 중국 베이징에서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다. 이 날의 사건은 통칭  '6.4 사건'이라 일컫지만, 보통 '천안문사건'으로 부른다. 한편 중국 정부에서 6.4란 날짜를 검열하고 있으므로 이를 피해 조롱조의 의미로 '5월 35일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사건은 1989년 4월,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 사후 중국 경제가 발전하기 시작하고 사회적 변혁이 시작되는 가운데 중국의 개혁을 지지하던 중화인민공화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인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이 사망하면서 촉발됐다. 중국은 1980년대에 경제개혁을 추진했지만 실제로는 일부 '엘리트' 집단에게만 득이 됐을 뿐, 대다수 국민에게는 오히려 피해가 가중되자 중국 전역에 '정치 엘리트주의'에 대한 불만이 커졌다. 이 때문에 공산당 일당제를 고수해 온 중국의 정치제도마저 위기를 겪게 됐다.

이 날을 상징하는 '탱크맨' 사진. 시민 진압을 위해 출동한 인민해방군 전차를 막아선 한 시민의 이 사진은 천안문 사건의 아이콘 같은 사진이 되었다. 그의 이후 행방은 아무도 모른다.

특히 80년대 말이 되면서 인플레와 부패, 대책없는 경제정책, 그리고 엘리트 정치주의에 따른 인재들의 정치권 접근성 제한이 문제가 되면서 사회적인 불만이 누적됐고, 이는 우선 학생들에 의해 표출되면서 대대적인 개혁을 원하는 목소리로 변했다. 특히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면서 시위대가 조직되어 민주주의 보장과 헌법 존중, 언론의 자유, 그리고 발언의 자유를 보장해 줄 것을 요구했다. 특히 시위대가 조직되자 일반 시민까지 참가하기 시작하면서 약 1백만 명의 시위대가 텐안먼 광장 앞에 운집했다.

사상 초유의 내부 시위에 당황한 중국 정부는 시위대를 달래면서 강경대응하는 이면적 태도를 보여 당 내부에서도 방침이 통일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였다. 5월 말이 되자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면서 약 400개의 지방도시에서 유사 시위가 벌어졌고, 일각에서는 평화시위를 표방하면서 단식 투쟁에 돌입했다. 그 과정에서 리펑(李鹏, 1928~2019) 총리나 왕첸(李鹏, 1908~1993) 인민해방군 장군 같은 이는 강경진압으로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촉구했으며, 결국에는 덩샤오핑(邓小平, 1904~1997) 주석이나 양상쿤(杨尚昆, 1907~1998) 국가수반도 설득됐다. 결국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은 5월 20일자로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최대 30만 명의 병력을 베이징으로 불러들였다.

이들 병력은 양상쿤의 이복형제인 양바이빙(楊白冰, 1920~2013) 대장의 지휘 하에 베이징 주요 길목을 장악했으며, 6월 4일 새벽까지 광장 중앙부로 시위대를 몰아들인 후 발포를 시작해 시위대 뿐 아니라 지나가던 행인들까지 모두 사살했다.

이 사건은 즉각적으로 국제사회의 관심이 집중되어 주요 국가 정부 뿐 아니라 인권관련 국제기구까지 모두 중국정부를 강하게 규탄했다. 뿐만 아니라 이 때부터 서방국가들은 중국에 대해 대대적인 무기 금수조치를 단행했다. 한편 이미 시위대에 칼을 대버린 중국은 정면 돌파를 선택해 시위대와 민주화 인사들을 체포했으며, 전국 각지의 유사 시위를 무력으로 해산시켰을 뿐 아니라 해외 언론인은 모두 국외로 강제 추방했다. 이 날 벌어진 진압 사건에 대해서도 강력한 언론 통제를 단행했으며, 공안의 단속을 강화해 시위대에 유리하거나 온정적인 보도를 내는 언론사는 즉시 휴간 또는 폐간해버렸다.

이 사건은 1986년부터 싹트고 있던 중국의 정치개혁을 완전히 뿌리부터 들어내버렸다. 중국은 덩샤오핑이 1992년 남부지방을 방문하면서 단계적인 개혁개방을 시작하고 있었는데, 이 모든 시도는 하루아침에 중단되고 중국의 정치와 경제, 사회 개혁은 거꾸로 후진하게 됐다. 하지만 이 사건은 오히려 중국 공산당의 위상을 역으로 강화하는 계기가 됐는데, 텐안먼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는 절대 정치적인 표현을 할 수 없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동시에 공산당의 정통성에 대해서도 의문시하는 의견은 표출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실제 텐안먼 학살로 이어진 6.4 사건은 1989년 4월 15일부터 6월 4일까지 1개월 2주 6일간 이어졌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공산당 내부에서도 개혁개방을 지지하던 인사들은 거의 모두 다 숙청당했다.

이 날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이, 체포당한 이의 숫자는 공식집계가 존재하지 않아 알 수 없다. 하지만 대략적인 추산으로만 사망자가 수천 명 규모였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부상자는 이를 훨씬 상회하는 숫자였을 것으로 추산한다. 한편 중국 공산당은 사건 후 사망한 시위대와 진압 병력의 수는 300명이며, 그 중에는 23명의 학생도 포함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중국 적십자 사는 사망자만 2,600명으로 집계했고, 베이징 주재 스위스 대사관은 2,700명 수준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정확한 희생자의 수가 파악되려면 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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