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오늘의 역사

사진과 함께 살펴보는 세계 속 이야기

현대사

[1994. 5. 19]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오나시스 여사, 암으로 타계

라마막 2023. 5. 21. 18:29

1994년 519, ()호지킨 림프종으로 전() 영부인 재클린 케네디(Jacqueline Kennedy Onassis, 1929~1994) 여사가 64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뉴욕 주 뉴욕 시에서 태어난 그녀의 원래 이름은 재클린 리 부비에(Jacqueline Lee Bouvier)였으며, 부친인 존 부비에는 알콜 중독증세가 있던 월스트리트의 브로커였다. 그런 부친이지만 장녀인 재클린을 끔찍이 예뻐했다.

하지만 일찍 아버지를 여읜 그녀는 어머니인 재닛 리(Janet Lee)와 양부인 유 어친클로스(Hugh Auchincloss)가 키웠으며, 재클린은 사립학교를 다니면서 승마를 즐기고, 파리에서 유학생활을 하며 유복하게 자랐다. 그녀가 첫 남편인 열 두살 연상의 부유한 정치가인 존 에프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1917~1963)를 만났을 당시, 그녀는 워싱턴 D.C. 지역에서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1953년에 결혼해 네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성년까지 살아남은 아이는 캐롤린(Caroline)과 존(John) 주니어 둘 뿐이었다.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백악관으로 들어갔다.

존 에프 케네디 당시 매사추세츠 주 상원의원과 재클린 부비어 여사.

나이 서른 하나에 영부인이 된 그녀는 워싱턴 D.C.에 젊음과 아름다움, 그리고 고상한 예술적 취향을 가져왔다. 그녀의 우선 순위는 항상 자녀들이었으며, 백악관에 있는 동안에는 백악관의 잃어버린 유산과 전통을 복원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녀는 라파예트 광장(Lafayette Square)를 복원하고, 정부가 예술 분야에 예산을 지원하도록 장려했다. 그녀는 당대를 대표하던 예술가들과 지식인을 백악관으로 자주 초대했으며, 젊고 유능한 전세계의 정치가들도 그녀를 통해 백악관에 발을 디뎠다. 안타깝게도 영부인으로써 그녀의 시간은 케네디의 암살로 인해 짧다면 짧은 3년 만에 끝났다.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에서 아들 존의 손을 잡고 있는 재클린.

1963, 불과 서른 넷의 나이로 미망인이 된 재클린 케네디는 곧 정계에서 스스로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간의 관심이 그녀로부터 멀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1968년 그리스의 선박왕인 아리스토틀 오나시스(Aristotle Onassis, 1906~1975)와 재혼했다. 오나시스는 그녀가 데려온 케네디의 아이들에게 모진 양부였고, 오나시스의 전부인들이 낳은 아이들은 공개적으로 재클린을 싫어했다. 이들 부부는 뉴욕과 뉴저지, 그리스 등지에 총 여섯 개의 저택을 두고 살았으나 오나시스의 딸인 크리스티나 오나시스는 케네디를 들먹이며 재클린이 저주 받은 여성이라고 오나시스에게 계속 주입했고, 아들 알렉산더 오나시스가 사망하자 아리스토틀 오나시스도 진짜 그 말을 믿은 듯 했다. 결국 오나시스가 죽자 재클린에게는 거의 유산이 돌아가지 않았으며, 크리스티나 오나시스는 재클린이 남편의 유언장에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조건으로 $2,500만 달러를 떼 주었다.

두 번째 남편의 사후 그녀는 뉴욕에서 출판사 편집장으로 일했으며, 살아 생전 했던 일 중 가장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노년의 재클린 케네디-오나시스 여사.

그녀는 평생 골초였으며, 이 때문인진 알 수 없으나 1993년 가을에 말기 암 진단을 받았다. 그녀는 6개월간 투병했지만 결국 아들 존, 딸 캐롤린이 지켜보는 가운데 뉴욕 시의 자택에서 1994519일에 눈을 감았다. 그녀 사후 시신은 알링턴(Arlington)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던 전 남편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 옆에 묻혔으며, 그녀의 출신지이자 사실상 반 평생을 보낸 고향인 뉴욕 시는 센트럴 파크(Central Park) 내 호수의 이름에 그녀 이름을 헌정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