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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8] 유신과 함께 창군한 일본 해군의 흥망성쇄

라마막 2023. 6. 7. 11:46

2차 세계대전 중 일본 해군은 1868년에 창군하여 1945년까지 존속했던 일본의 "해군"으로, 1945년 일본의 패망과 함께 해산됐다.

일본제국 해군은 1920년까지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해군이었으며, 일본 해군보다 큰 규모의 해군은 영국의 왕립해군(The Royal Navy: RN)과 미 해군 뿐이었다. 일본 해군에는 해군 항공대가 설치되어 있어 자체적인 항공기를 보유했으며, 이를 이용하여 함대에서 함재기를 이용한 공중 타격이 가능했다. 일본 해군은 실질적으로 태평양 전쟁 기간 중 태평양 전역에서 연합군을 홀로 상대했다.

1868년에 일어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은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의 막부체제를 종식시켰다. 같은 해부터 메이지 신 정부는 중앙집권화 된 일본 정부 체제를 출범했으며, 서방을 모델로 하여 이들과 대등한 전력을 갖추기 위해 최대한의 자원을 이용하여 단기간 내 제국의 해군을 창설했다.

: 일본 해군이나 해상자위대 자체는 최초의 일본 해군의 기원을 3세기 경 고분(古墳)시대부터 보유하고 있던 수상 전력으로 보고 있다. 사실 섬으로 이루어진 국가다 보니 나름의 '해상 전력'의 역사가 긴 편인데, 중세 이전에 일본의 '해상 전력'이 이룩한 최대의 전과는 1274년과 1281년 원(元)나라의 쿠빌라이 칸(忽必烈 汗, 1215~1294)이 침공해오자 이를 격퇴한 대몽항쟁이다. 일본은 1592년 조선을 침공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 1537~1598)가 해상 무역이나 해적질로 먹고 살던 대형 다이묘(大名)를 동원했고, 그 중에는 훗날 사쓰마 번(薩摩藩)이 되는 시마즈(島津) 가문도 동원되어 해전을 지휘했다. 일본이 최초로 대양 횡단이 가능한 전함을 건조한 것은 17세기 초로, 서구 세계와 처음 본격적으로 일본이 접촉하게 되자 센다이(仙台) 지역의 다이묘가 도쿠가와 막부와 협정을 체결한 뒤 500톤급 갤리온 전함인 다테마루(伊達丸) 함을 건조했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현대적인 "해군" 창군에 나선 것은 1868년 보신전쟁(戊辰戦争) 이후였다. 1868년 3월 26일, 메이지 정부는 사가(佐賀) 번, 초슈(長州) 번, 사쓰마 번, 쿠루메(久留米) 번, 구마모토(熊本) 번, 히로시마(広島) 번이 보유 중이던 함정을 모두 오사카 만으로 집결시킨 뒤 사상 첫 함정 사열식을 실시했다. 당시 6개 번이 집결시킨 함정의 총 톤 수는 2,252톤으로 이 날 함께 참여한 프랑스 해군 함정 한 척보다도 톤 수가 적었다. 일본은 이듬해인 1869년, 보신전쟁 종전 두 달 뒤 해군을 정식으로 창설했다.

도쿠가와 막부의 해군을 지휘하던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 武揚, 1836~1908) 자작은 메이지 정부에 항복하지 않고 북부 혼슈로 피신해 도쿠가와 군의 잔여 병력을 규합하고자 했으나, 8척의 증기선과 2,000명의 병력으로는 저항이 거의 불가능하자 결국 홋카이도(北海道)로 피신하여 에조 공화국(蝦夷共和國)을 수립했다. 하지만 곧 이들 진압을 위해 파견된 메이지 막부군과 하코다테(函館) 만에서 격돌한 에노모토는 1869년 5월에 패배했으며, 신정부군은 프랑스에서 주문한 철선인 코텟츠(甲鉄)함을 처음 투입하면서 첫 해전의 경험을 쌓았다.

1868년 2월, 메이지 정부는 보신전쟁 중 나포한 막부군 측 함정을 모두 재편한 뒤 통합했으며, 1872년 육군과 해군을 본격적으로 설치하면서 상위 기관으로 육군성과 해군성을 두었다. 하지만 1872년까지도 메이지 정부가 전국의 번국을 상대로 아직 중앙 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해 각 번들이 함정을 제각각 보유했다. 에노모토의 저항을 본 메이지 정부는 반드시 전 해/육군 전력을 중앙통제 해야 한다고 판단했으며, 이에 따라 1871년부로 모든 번을 없애고 현을 설치하는 "폐번치현(廃藩置県)" 단행한 뒤 각 번국이 보유하고 있던 해군 전력도 모두 메이지 정부가 흡수했다.

일본 해군은 이후 함정의 현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1871년 사이고 다카모리(西鄕 隆盛, 1828~1877)가 우선 조선을 합병해야 한다며 출병을 제창한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웠으나 일본 정부 측이 서구 국가들의 압력을 거스를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일본이 첫 해외 개입을 실시한 사건은 1874년 타이완(台湾) 출병이었으나, 사실 이 '출병'의 주역은 육군이었을 뿐, 해군은 병력 수송의 역할만 맡는데 그쳤다. 하지만 일본은 계속 조선 출병에도 계속 관심을 기울이다가 운요(雲揚)호로 조선정부에 의도적인 도발을 했으며, 결국 의도대로 강화도에서 운요호가 조선군의 공격을 받자 1875년에 조선으로 출병을 단행했다. 일본은 1876년에 조선군을 꺾고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면서 사실상 한반도를 일본의 영향권 아래로 가져왔다. 이 사건은 한 때 서방에 의해 강제로 문호를 열었던 일본이 이들의 방법을 그대로 차용해 쓴 사건이기도 한데, 의도적인 도발로 전쟁 명분을 만든 후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하는 방식을 쓴 제국주의 전술을 그대로 활용했다.

일본 해군의 본격적인 첫 승리는 1894년~1895년에 벌어진 청일전쟁으로, 당시 청나라 정부 역시 비교적 현대화 된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청나라의 북양함대(北洋艦隊)는 강철선인 첸위안(鎮遠)함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구식 전술을 활용한 반면, 일본 측은 영국에 서 건조한 드레드노트급 전함 후지(富士)함, 야시마(八島)함, 순양함 아카시(明石)함을 투입했다. 청-일은 앞서 양자협정을 체결하면서 '조선에 출병할 경우 상대방에게 미리 먼저 알린다'는 원칙을 세웠지만,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이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키자 청나라가 일본에 통고없이 진압을 시도한 것이 문제가 됐다. 결국 일본이 중국의 협정 위반을 문제삼아 마주 병력을 전개했고, 결국 쌍방은 아산만의 풍도(豊島)에서 충돌하면서 본격적인 전쟁이 됐다. 이 전쟁에서 청군을 꺾은 일본은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下関) 조약을 체결하면서 대만과 페스카도레(펑후) 섬과 랴오닝 반도를 할양 받았으나 곧 서방의 압력으로 랴오닝은 포기하고 말았다.

이후 의화단 사건(1900) 등에 참전하면서 실력을 쌓던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통해 러시아 해군을 꺾고 사실상 "서구 해군에 준하는" 해군으로 영국을 비롯한 서방 선진국으로부터 인정받았으며, 1902년 영국과 영-일 동맹을 체결했다. 일본은 1914년 1차 세계대전 발발 후에는 연합국 측으로 참전했으며, 주로 독일이 중국 칭다오 반도에서 운영하던 식민지를 공격하면서 전공을 쌓았다.

일본 해군이 본격적으로 팽창한 시기는 간전기 시기(1918~1937)로, 이 시기의 일본 해군은 정부 예산의 32%를 사용하면서 10척의 전함과 38척의 순양함, 112척의 구축함, 65척의 잠수함을 보유한 초대형 해군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워싱턴에서 해군조약이 체결되면서 해군 함정의 톤 수를 끝도 없이 키우는 "군비경쟁"을 중지하게 됐으며, 이에 따라 총 함정의 톤 수를 315,000톤으로 제한 받았다(영국-미국은 525,000톤). 일본은 사실상 이 조약이 일본 해군을 제약할 목적이라고 판단하여 분개했는데, 쉽게 해석하자면 일본의 해군전력은 절대 서방을 넘을 수 없게 제한해버렸기 때문이다.

이후 일본은 지속적으로 중국과 분쟁을 이어오다가 중일전쟁이 발발했으며, 이 때부터 해군 항공전력을 본격 운영하면서 해군 자체가 독자적으로 작전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돋움했다. 특히 이 때부터 일본이 본격적으로 운용한 '항공모함'은 범위가 큰 대양에서 해군이 항공전력으로 전투를 치르는 새로운 전장의 개념을 가져왔다. 하지만 중국과 동남아를 상대로 일본이 무리한 팽창을 거듭하자 미국이 이에 대해 중단을 요구했고, 중일전쟁 이전의 국경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대대적인 자산 동결과 제재 조치를 단행하겠다고 선언하자 그간 서구를 상대로 준비를 해오던 일본은 돌연 1941년 가을 경 미국을 상대로 개전을 결심했다.

일본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에 기습 공격을 감행해 2,403명의 미국인을 사살하고 진주만에 정박 중이던 태평양함대를 대파했다. 미국의 전력이 크게 꺾인 덕에 일본은 이후 6개월간 태평양 및 동남아 전역에서 어마어마한 팽창을 시작했으며, 1942년 4월 인도양 기습작전으로 동남아 지역에서 영국 해군을 완전히 몰아냈다. 이후 일본은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필리핀을 함락했을 뿐 아니라 태평양 전역을 장악했고, 사실상 태평양의 최강자가 되면서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위협하게 됐다.

하지만 산호해(Coral Sea) 전투(1942. 5. 4~8)에서 미-호 연합해군에 패한 일본은  오스트레일리아를 고립시키는데 실패했고, 곧이어 같은 해 6월 4일~7일간 벌어진 미드웨이(Midway) 해전에서도 패하면서 작전적기세가 꺾여 공세에서 수세로 돌아섰다. 이 시기에 계속 이어진 솔로몬제도(Solomon Islands) 작전에서 전투력이 계속 소모된 일본은 전세를 뒤집을 능력을 완전히 잃었고, 1943년 중반부터 미국의 엄청난 공업력이 최대로 가동하기 시작하면서 곧 일본은 미국에 물량으로 압도 당했다. 이후 1944년 6월 19일에 벌어진 필리핀 해전은 일본 해군의 빠듯하던 항공 전력을 사실상 괴멸 시켰으며, 연이어 벌어진 레이테(Layte)만 해전(1944. 10. 23~26)에서는 1척의 항모를 포함한 67대 이상의 함정을 상실해 수상 전력 마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항공전력을 상실한 1944년 중순부터는 "가미가제(神風)" 특공대로 불리는 자살돌격까지 감행했지만 가뜩이나 빠듯한 항공전력에 부담만 가중 했으며, 1945년 7월이 됐을 무렵에는 사실상 대부분의 일본해군 함정은 격침 당했고 얼마 안되는 잔여 함정은 항구 밖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됐다. 일본은 1945년 8월부터 사실상 항복 절차에 들어갔는데, 이 시기까지 남아있던 기함급 함정은 나가토(長門)함 한 척 뿐이었다.

일본 해군은 1945년 8월 15일, 일본 정부가 항복하면서 해체 수순을 밟았다. 일본에 진주한 연합군은 일본 해군의 잔여 함을 대부분 인수했으며, 1945년에 말에 공식적으로 일본 해군을 해산했다. 일본은 1947년 신 헌법인 '평화헌법'을 도입하면서 9조에 "일본 국민은 정의와 질서를 기조로 하는 국제평화를 성실히 희구(希求)하고, 국권의 발동에 의한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포기한다.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이외의 전력은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은 인정되지 않는다."라는 문구가 포함됐다.

하지만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냉전이 시작됐고, 이에 따라 태평양 지역에서 미군을 보조할 지원 세력이 필요해진 미국은 우선 해안 경비를 맡는 일본 경비대(警備隊)를 1952년 8월 1일에 창설하고 상위 기관으로 보안청(保安庁)을 설치했다. 주로 이들은 해안 경비와 소해 임무 등을 소화했으며, 1954년 자위대 법이 통과되면서 해상경비대는 해상자위대(海上自衛隊)로 증편됐다. 자위대는 명칭처럼 전수방위 원칙에 따라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 '방어집단'을 표방하고 있다. 현재 해상자위대는 50,800명 규모이며, 보유 함정 수는 150척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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