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 5월 27일, 미군에서 유일하게 육군 장성 계급과 해군 제독 계급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던 새뮤얼 카터(Samuel P. Carter, 1819~1891) 장군이 사망했다. 그는 1846년 애나폴리스 미 해군사관학교(US Naval Academy @ Annapolis)를 졸업했으며, 남북전쟁 중 미 연방군(=북군)에서 육군 준장 계급을 받았다. 그는 종전 후인 1882년 해군 소장이 되었다.
: 사실 육군과 공군에서 장성을 단 케이스(=헨리 아놀드[Henry H. Arnold, 1886~1950] 원수), 혹은 육군과 해군상선대(USMS: US Maritime Service)에서 장성을 단 케이스(=조셉 스튜어트 [Joseph D.Stewart, 1942~2019] 소장: 해군상선대 계급은 사후 추서)에서 동시에 장관급이 됐던 사례는 있으나, 미 육군과 해군에서 동시에 장관급이 된 케이스로는 새뮤얼 카터가 유일하다.
카터는 테네시 주 엘리자베스턴(Elizabethton, TN) 출신으로, 부모가 교육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사립학교인 더필드 아카데미(Duffield Academy)를 졸업한 후 워싱턴 칼리지(Washington College)로 진학했으며, 다시 잠시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에 재학하다가 1840년 2월 미 해군에 입대했다. 그는 해군에서 수병으로 5년간 복무하던 중 상관 추천을 통해 미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으며, 1846년 졸업과 함께 임관하여 미-멕시코 전쟁에 참전했다. 전쟁 중 그는 오하이오 함(USS Ohio)에 승선해 베라크루즈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그는 미 해군에서 복무하며 태평양 쪽에서 근무했으며, 1960년 남북전쟁 발발 직전에는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교관을 맡고 있었다. 1861년 초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남부 출신이던 그는 연방 정부에 충성 서약서를 쓰고 연방에 남았으며, 이 소식을 들은 테네시 주 상원의원인 앤드류 존슨(Andrew Johnson, 1808~1875/미 17대 대통령)은 전쟁부에 요청해 카터를 해군에서 육군으로 전군 시켰다. 그를 굳이 전군시킨 이유는 아직 연방 잔류를 원하는 테네시 동부의 주민들을 규합해 지휘할 전문 직업 군인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는 테네시가 결국 남부연합에 점령되자 켄터키로 병력을 이동시킨 후 연방군의 지휘를 계속 받았으며, 1861년 말 해군 군적을 말소시키지 않은 상태로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보병 여단을 지휘해 밀 스프링스(Mil Springs) 전투에 참가했고, 컴벌랜드 갭(Cumberland Gap)을 점령한 뒤 테네시 탈환을 희망했으나 남부연합의 브랙스턴 브래그(Braxton Bragg, 1817~1876) 장군과 페리빌(Perryville)에서 격돌하는 바람에 테네시 진공은 포기했다.
하지만 카터는 브래그를 격파한 뒤 상관을 설득하여 동 테네시 탈환을 시도했으며, 동테네시와 버지니아 철도를 파괴해 윌리엄 로스크랜스(William S. Rosecrans, 1819~1898) 소장이 중부 테네시를 점령하는 작전을 지원한다는 거대한 계획을 세웠다. 카터는 동 테네시로 진군하면서 남부연합군을 연파했고, 남부 연합군의 열차와 군수물자를 대규모로 노획한 뒤 켄터키로 귀환했다. 원래 계획은 이 직후 동 테네시로 진입하는 것이었으나, 이 시점까지 카터가 입은 병력 손실이 꽤 커 전력이 크게 감소했다고 판단한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 대통령은 동 테네시 진공 작전을 취소했다.
하지만 그는 1863년 미 제 23군단 예하 기병 사단장에 보임되어 테네시 공세를 시작했으며, 블루 스프링스(Blue Springs)와 녹스빌(Knoxville)에서 남부연합군과 붙어 연전연승 했다.
1965년 카터는 와이즈 포크(Wyse Fork) 전투에서 북군의 좌익 지휘를 맡았으며, 이 전투에 앞서 전시 가(假) 계급으로 육군 소장 계급을 받았다. 그는 종전 직전까지 임시로 미 제 23군단장을 역임했다.
그는 전쟁기간 내내 육군 장성을 지냈으나, 미 해군 역시 그의 군적을 말소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1865년까지 계속 진급시켜 정규군(해군) 중령까지 진급 시켜 놓았다. 종전 후 그는 해군으로 환원됐으며, 전시 동원 해제에 따라 중령이 되어 모노카시(USS Monocacy)함 함장으로 보직됐다. 그는 1870년 해군 대령으로 진급해 1873년까지 해군사관학교장을 지냈으며, 1877년에 다시 야전 임무를 받아 다시 바다로 나가 유럽 지역에서 근무했다. 그는 1878년 준장으로 진급 후 1881년 8월 전역을 선택했으며, 1882년 5월에 전역하기 직전 해군에서 그에게 소장 계급을 부여했다. 그는 전역 후 워싱턴 D.C.에 집을 마련해 말년을 보냈으며, 사후 오크힐 국립묘지에 매장됐다.
그는 1877년 조지 워싱턴의 영부인이던 마사 커스티스 워싱턴(Martha Custis Washington, 1731~1802)의 자손인 마사 커스티스 윌리엄스(Martha Custis Williams, 1827~1899)와 결혼했다. 그의 고향인 테네시 주 엘리자베스턴 위치한 그의 생가는 역사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으며, 작은 기념관이 설치되어 그의 삶과 군 경력을 기리고 있다.
사실 해군과 육군에서 동시에 복무 기록을 가진 케이스는 라파엘 셈즈(Rafael Semmes, 1809~1887) 소장이 더 있지만, 미 정규군이 아니기 때문에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듯 하다. 셈즈는 남북전쟁 전 미 해군에서 중령까지 진급했다가 전쟁 발발 후 남부연합에서 임관했으며, 여기서 해군 소장까지 진급했다. 그는 전쟁기간 중인 1865년 4월 5일부터 26일까지 임시로 육군 준장 계급을 달고 지상군을 지휘했으나, 남부연합 상원에서 이 계급을 인준한 적이 없어 정식 육군 장성으로 인정 받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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