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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1차세계대전사

[1918. 11. 11] 제1차세계대전 종전의 순간

라마막 2022. 11. 30. 23:26

휴전협정서를 체결한 뒤 기념촬영한 페르디낭 포슈 원수와 연합군 측 대표단.

프랑스 군의 페르디낭 포슈(Ferdinand Foch, 1851~1929) 원수와 연합군 대표단이 1918년 11월 11일, 콩피에뉴(Compiegne) 숲 속에 정차시킨 열차 안에서 1차 세계대전 휴전협정을 체결한 후에 찍은 기념 사진.
1918년 11월 11일, 104년 전, 콩피에뉴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제 1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 전쟁이 종결됐다.
종전을 축하하고 있는 영-미군 병사들과 시민들


독일은 전황이 불리해진 가운데 수병 반란으로 야기된 혁명이 전 국토로 퍼지고 있었으며, 전쟁에 지친 국민들도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했다. 이에 독일과 연합국은 1918년 11월 5일에 처음으로 휴전 협상을 시작하기로 합의하고 한 자리에 앉았다. 11월 6일, 독일 정치가인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Matthias Erzberger, 1875~1921)가 이끄는 독일 측 협상대표단이 프랑스로 출발했으며, 이들은 11월 8일 협상장에 도착했다.
연합군이 협상 테이블에 앉자마자 요구한 것은 지상, 해상, 하늘에서 벌어지는 모든 교전을 중단할 것, 독일이 현재 점령 중인 해외 영토에서 완전히 철군하여 라인 강 뒤로 병력을 철수할 것, 연합군 포로를 석방하고 군수물자 대부분을 연합군에 넘길 것, 그리고 독일의 황제(카이저)인 빌헬름 2세(Wilhelm II, 1859~1941)의 퇴위였다.


협정 합의가 완료되자 최종 서명은 11월 11일 프랑스 군 및 연합군 사령관 포슈 원수 소유의 개인 열차 안에서 하기로 했으며, 장소 역시 콩피에뉴 숲 속에서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1919년 11월 9일, 빌헬름 2세가 결국 퇴위 했으며, 독일 혁명세력은 '독일 공화국(바이마르 공화국)'을 선포했다. 빌헬름 2세는 이튿날 아침 열차에 올라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독일의 신임 총리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Friedrich Ebert, 1871~1925/1919~1925까지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 역임)는 에르츠베르거에게 휴전 협정서에 서명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같은 날 1차세계대전의 마지막 전투인 브리뉴-뮤즈(Brigne-Meuse) 작전 개시 명령도 함께 내렸다.

1918년 11월 11일 오전 5시 10분, 결국 1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킨 휴전 협정서가 콩피에뉴 숲에서 체결됐다. 열차에는 포슈 원수가 연합군 대표로 탑승했고, 독일측은 에르츠베르거가 탑승하여 협정서에 서명했다. 협정서는 오전 11시부터 휴전을 발효하는 것으로 정했으므로, 전쟁은 개전으로부터 11개월 11일 11시간 뒤에 끝나게 설계한 것이다.
휴전을 자축 중인 미군 병사들.


전쟁 마지막 날, 전선에는 휴전협정이 곧 체결될 것이라는 소식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마지막 하루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이날 동안 2,738명이 전사하고 10,944명이 부상을 입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마지막으로 전사한 병사는 이날 오전 10:59분에 전사한 미 육군의 헨리 건터(Henry Gunther, 1895~1918) 이병이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 독일군 기관총 진지로 돌격하던 중 총알 세례를 받고 마지막 전사자가 되어 쓰러졌다.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 정각, 프랑스와 영국, 벨기에 전역의 성당 종탑에서 종이 울리며 제 1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끝났음을 알렸다. 그와 동시에 희열에 찬 병사들과 전쟁 당사국 시민들이 거리로 뛰어나오며 길고도 길었던 1차 대전의 종결을 축하했다.
휴전을 축하하고 있는 영국군 병사들.


콩피에뉴 협정은 약 5년 가까이 진행된 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 지었다. 이 기간 중 약 1천 만 명의 군인과 80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희생되어 당시까지 역대 전쟁 중 민간인 사망에 있어 최대 비율, 최다 사망의 기록을 세웠으며, 부상자 역시 2천만 명 가까이 양산되었다. 특히 참호전과 독가스 사용으로 야기된 대량살상 양상으로 프랑스는 사실상 한 세대의 가용한 남성인구가 소멸하다시피 해 이후 국가 산업과 경쟁력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독일은 이 때 부과받은 전쟁 배상금으로 경제가 회복이 되지 못하다가 결국 2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되었으며, 문제의 배상금 역시 납부와 중단을 반복하다가 2010년 10월 3일, 통일독일 정부가 미화 $9,400만 달러를 마지막 납부금으로 지불하면서 완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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