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의 전설적인 "하얀 사신(死神)", 시모 헤위하(Simo Häyhä, 1905~2002). 불과 160cm에 불과한 그는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저격수로 꼽힌다. 그는 2차세계대전 중 소련군을 상대로 공식 사살기록만 505회를 기록했다.
러시아제 모신-나강 라이플을 핀란드 민병대 사양으로 개조한 저격총인 화이트가드(White Guard) M/28을 사용한 그는 핀란드 겨울전쟁(1939~1940) 기간인 100일 남짓한 시간 동안 505명 저격을 달성했다.
그는 망원식 조준경 대신 그저 총기의 가늠좌 눈금 만을 이용하여 저격하기를 선호했으며, 항상 저격을 할 때엔 눈을 퍼 입 안에 물고 있었다. 이는 차가운 핀란드 겨울 공기 중에 자신의 뜨거운 입김이 피어올라 위치를 발각 당하지 않기 위해서 였다.
그는 소련군의 역 저격수와 포격 공격을 빈번하게 받았으며, 그러던 중인 1940년 3월 6일, 소련군 저격수가 쏜 작열탄에 맞아 왼쪽 아래 턱이 날라갔다. 그는 그 상황에도 살아남았지만 회복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 스웨덴 키스키넨 태생. 여덟 자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으며, 집안은 기독교 집안이었다. 군 입대 전까지 그는 농부이자 사냥꾼, 스키선수로 활동하다가 나이 17세가 되던 해에 핀란드 자원 민병대에 입대했다.
그는 군 입대 직후부터 저격수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군 내의 사격대회에서 우승을 휩쓸었다. 그는 초창기에 성격이 소극적이라 관심을 받는 것을 싫어해 사진 촬영을 할 때에도 뒤에 서는 등 불편해 했지만, 스스로 성격을 고쳐야겠다고 결심하면서부터 일부러 가운데로 나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세가 되던 1925년에는 다시 15개월 의무복무를 위해 핀란드 정규군에 입대했으며, 비이푸리 주 라이볼라의 제 2 자전거대대로 배속됐다. 이 곳에서 그는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38년까지 저격수 교육을 받았다. 그는 이미 이 시절 물체의 거리를 정확하게 측정할 줄 알았으며, 1m에서 150m 범위 내의 표적을 정확하게 식별했다. 심지어 그는 정확도도 뛰어나 150m 거리에서 1분동안 동일한 표적을 16회나 명중시켰다.
그는 핀란드가 소련을 상대로 겨울전쟁을 개전하자 제 34연대 6중대로 배속되었으며, -40도~20도의 혹한 기후 속에서 활동했다.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항상 백색으로 입었으며, 소련군은 혹한용 위장복을 입지 않았으므로 쉽게 포착되어 헤위하의 먹이가 되었다. 심지어 전쟁 초반만 해도 공산혁명의 영향으로 유능한 소련 군인들은 대부분 수감 상태였으므로 헤위하를 상대할 수 있는 적은 거의 없었다.
소련군은 그를 "하얀 사신"이라고 불렀다는 말이 있으나, 훗날 기록에 따르면 원래 이 "하얀 사신"이라는 명칭은 핀란드의 백색 삼림지대를 일컫던 말이며, 그것이 헤위하의 별명이 된 것은 전쟁이 끝나고 한참 뒤인 1980년대에 언론사와 전기작가 등이 붙인 것에 불과하다. 사실 실제 전쟁 중 핀란드군 동료들은 그를 "마법의 사수"라고 불렀다고 한다.
불과 100일에 불과했던 전쟁 중 그는 공식 기록으로 505회의 저격을 남겼으나, 이는 동료들이 확인을 해주고, 저격을 당한 후 죽은 경우에 대해서만 카운트를 한 것이다. 예를 들어 동일 표적을 중복해서 맞힌 사례나 근거리에서 기관총으로 사살한 적은 숫자에 넣지 않았으므로 일각에서는 최대 542회까지 실제 저격을 했을 것으로도 본다.
1940년 3월 6일, 그는 소련군 저격수와 싸우던 중 작열탄에 맞는 바람에 아래쪽 턱이 날아갔다. 그는 그 자리에서 사망한 듯 보여 시신 더미에 던져졌지만, 헤위하의 상관은 그의 시신을 찾아오라고 부하들에게 시켜 시신더미를 수색하던 중 헤위하가 다리를 움직이는 것이 발견되어 야전병원으로 후송했다. 하지만 당시 후송한 병사들조차도 헤위하가 "얼굴 반 이상이 날아갔다"고 보고했다.
소련군과 핀란드군 사이에서는 헤위하가 전사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으며, 그는 3월 13일이 되서야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바로 이 날 쌍방이 휴전협정을 체결했으므로 그의 생존여부는 전황에 더 이상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그는 정신을 차린 후 신문에 난 자신의 부고기사를 읽고 신문사에 직접 편지를 써 수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이후 26회의 수술을 거치면서 14개월간 투병했다.
전후 그는 긴 재활치료에 들어갔으며, 얼굴은 여전히 망가진 상태였지만 그래도 생활은 가능할 정도까지 복원했다. 그는 전후 작은 농장을 받았다. 그는 순록 사냥꾼으로 만년을 조용히 보냈지만, 그 와중에도 간간히 살해 협박이나 위협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겸손한 사람이었으므로 전쟁 중 공적을 떠벌이고 다니지 않았으며, 저격술에 대해서도 거의 말하지 않았다. 1998년에 어느 언론사가 그와 인터뷰를 하면서 "훌륭한 저격수가 되는 방법이 있느냐"라고 물었는데, 그는 "연습 뿐이지."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는 96세가 되던 2001년에 처음으로 전쟁 경험에 대해 언론사와 인터뷰를 했으며, 이 때 "나는 명령받은 대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때 다들 나같이 하지 않았다면 오늘날 핀란드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헤위하는 2002년, 하미나의 한 요양소에서 지내다가 96세를 일기로 타계해 고향 루오콜라티에 묻혔다. 헤위하는 생전 독신으로 지냈으며 자녀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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