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독일이 입안한 영국 본토 강습 양륙작전, 통칭 "바다사자(Sea Lion)" 작전 계획도. 이 작전은 영국 경제가 악화되면 항공기 가동률이 저하하는 시점에 독일공군 루프트바페가 제공권을 뺏으며, 이후 왕립해군에 대한 대규모 폭격으로 영국 해군을 격멸시킨 뒤 영국에 상륙한다는 것이 작전의 골자였다.
동, 서 유럽을 석권한 나치 독일은 서유럽의 마지막 저항세력인 영국을 정복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영국의 정복은 미국의 참전의지를 완전히 꺾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했으므로 무엇보다 중요했다. 유럽 대륙의 집결지 역할을 할 수 있는 영국이 없다면, 미국 본토에서부터 직접 유럽을 공격하는 것은 거리 부담이 늘어나 보급선 유지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물론 바다를 건너 공격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으므로 히틀러는 영국 본토 공격을 주저했으며 영국 정복을 최우선 고려사항으로 보지 않았다. 비록 영국은 해외원정군이 패퇴하면서 육상전력이 큰 타격을 입었지만 여전히 왕립해군은 제해권을 유지하며 위세를 과시했고, 왕립공군도 만만치 않은 전력으로 독일에 맞서고 있렀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모든 외교 카드로 영국을 굴복시키는 것을 우선 순위로 두었고, 모든 카드가 통하지 않으면 마지막 수단으로 영국 본토 침공을 단행하도록 했다.
독일군 총참모부는 알프레드 요들(Alfred Jodl, 1890~1946) 참모장의 입안으로 영국 침공 계획을 1940년 6월부터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우선 제공권과 제해권을 쥔 왕립해군과 공군부터 제거할 필요성을 느꼈으므로 최대한 상선부터 피해를 입혀 해외로부터 들어가는 물자보급을 끊고, 장기적으로는 영국 국민들의 사기를 꺾고자 했다. 최초에는 시내에서 폭탄 테러를 반복 자행하는 방법도 고려됐으나, 그것이 국민 사기에 끼치는 영향은 불분명했으므로 제외됐다.
하지만 그 직후 작전회의에서 프란츠 할더(Franz Halder, 1884~1972) 총참모장은 히틀러의 관심이 소련 침공으로 옮겨갔다면서 작전 보류를 지시했다. 그 사이 작전 계획을 보완한 독일 총참모부는 7월 2일부터 침공계획을 다시 건의했고, 히틀러는 오직 제공권 장악이 될때만 작전을 단행하겠다고 말한 뒤 언제쯤 그것이 가능하겠냐고 물었다. 독일 공군 측은 7월 11일에 다시 보고하면서 "영국 공군을 격파하고, 공장 시설과 보급체계를 파괴하되 왕립 해군까지 격멸하는 것은 부차적인 목표로 삼는다고 하면" 작전개시 후 14일에서 28일 정도 뒤에 제공권 달성이 가능하다고 답했다. 같은 날 독일 해군의 에리히 래더(Erich Raeder, 1876~1960) 원수는 베르그호프의 히틀러 별장에서 따로 만났으며, 이 자리에서 래더는 "(히틀러의 우선 목표인) 영국의 정치적 굴복을 강요한다고 해도 항공전력과 잠수함 전력을 동원해 제병협동으로 포위해야 할 것"이라고 했고, 히틀러도 이에 부분적으로 동의했다. 히틀러의 재가에 따라 독일 공군은 7월 10일부터 영국 본토 공격에 착수해 여건조성에 들어갔다.
알프레드 요들 장군은 7월 12일자로 후속 작전인 영국 본토 상륙 계획안을 내놓았으며, 독일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하면 후속부대가 도하작전을 통해 영국을 침공하는 내용을 히틀러에게 보고했다. 이 자리에 히틀러는 주요 직위자와 동석했으나 평소와 달리 세부작전에 대해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으며, 보고가 끝날 때까지 큰 흥미를 보이지 않았으나 보고가 끝나자 "그럼 그대로 실시해라"고만 명령을 하달했다.
히틀러는 1940년 7월 16일자로 총통 지시사항 16호를 통해 영국 상륙작전을 시작하라고 정식으로 공표하면서 "군사적으로 희망이 없는 상황임에도 영국은 협상할 의사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번 작전의 핵심은 영국 본토를 파괴해 독일을 상대로 한 적들의 저항이 계속될 근간을 없애는 것이며, 필요시에는 영국 전토를 점령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히틀러는 이 자리에서 작전명으로 '바다사자'를 부여했다.
히틀러는 이 자리에서 네 가지 사전 조건이 충족될 때만 상륙작전을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각각,
1. 왕립공군이 완전히 격파되며, 추후 독일이 영국 본토를 건너 공격할 때 영향을 줄 수 없을 정도가 된다.
2. 상륙 전에 영불해협 상의 영국군 기뢰를 모두 정리하며, 도버해협은 양쪽 끝을 독일측의 기뢰로 막는다.
3. 영국과 점령된 프랑스 사이의 해안은 야포를 비롯한 중화기로 완전히 장악한다.
4. 왕립해군을 북해와 지중해로 끌어내 교전을 강요함으로써 본토 상륙전에 영향을 끼치기 어렵게 한다. 영국 본토를 수비하는 왕립해군 전대는 항공력과 어뢰로 격멸한다.
는 것이었다.
사실 히틀러가 막판까지 영국 침공을 주저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개전 직후까지도 영국의 고위관계층 일부는 독일과 친밀했고, 이 때문에 히틀러는 마지막까지도 '혹시나' 영국이 독일의 동맹이 되어 뒷문을 지켜줄 든든한 존재가 되어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아마 그는 '강한 동맹'을 자처했으나 개전 수주 만에 전투불능이 된 이탈리아를 보며 더욱 더 동맹의 존재에 목말랐을 지도 모른다.
독일은 사전 여건조성을 위해 독일 공군을 이용해 영국 본토 공격을 단행했으나, 결과는 알다시피 3개월의 전투 끝에 독일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독일은 '바다사자' 작전 단행에 앞서 해안선 봉쇄와 보급선 공격, 항공전력을 이용한 본토 타격으로 여건 조성에 나섰으나 전 국민이 일치단결한 영국의 처절한 저항에 밀렸으며, 결국 히틀러가 작전 단행의 사전조건으로 걸었던 제공권은 쥐어보지도 못했다. 통칭 '대영 공방전(battle of Britain)' 기간 중 독일은 2,550대가 넘는 전투기를 투입했으나 1,977대가 파괴됐고, 전사자만 2,585명이 발생해 처절한 패배로 막을 내렸다. 영국 역시 전투기만 1,744대를 잃었고, 민간인 사망도 23,000명에 달했지만 유럽 전역이 나치에게 점령당한 상황에서 홀로 조국을 지켜냈다는 자부심과 사기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전리품이 되었다.
결국 7월 말까지 사전 여건이 조성되는 결과를 기다리던 히틀러는 독일 공군이 결국 사전 여건조성에 실패하는 것을 보자 8월까지 일단 작전을 보류하라고 한 뒤 본인의 관심사이던 러시아 전역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총참모부는 8월 하순까지도 여건 조성은 어렵다는 의견을 냈고, 그 이후에는 기상 상황이 부정적일 수 있다는 보고가 계속 이어지자 히틀러는 결국 바다사자 작전을 무한정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후 전쟁의 전개가 두 번 다시 영국을 침공할 만한 여유를 주지 않았으며, 히틀러가 지정한 사전 조건은 영영 충족되지 못했으므로 이 작전은 영원히 실행되지 못한 채 종전을 맞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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