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은 여성이 군에 속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오히려 더 열심히 노력했죠."
한국계 이민가정 출신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수산 안 커디(Susan Ahn Cuddy/안수산)와 그녀의 형제 자매들은 어려서부터 줄곧 부친으로부터 "훌륭한 미국인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부친의 가르침대로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에 공습을 가해오자 곧장 미 해군에 수병으로 입대해 미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여성 장교로 임관했다.
그녀는 2차 세계대전 중 전투함에 탑승해 미 해군 역사상 첫 함포장교(gunnery officer)가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해군 내의 엄청난 성 차별과 인종 차별을 겪었지만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50구경 기관총 교관으로 활약하며 우수한 수병들을 양성했다.
그녀가 교관으로 교육하던 중에도 "아시아계 여성"이기 때문에 그녀를 만만히 보는 훈련생들이 더러 있었지만, 그녀는 그들 앞에 서서 "너희가 야전에서 무슨 대단한 일을 하고 다니는지는 관심없어. 왜냐면 지금은 내 앞에 있으니까. 여기 있는 동안에는 내가 하란대로 굴러!"라고 거침없이 말했다.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의 장녀. 1915년 1월 16일, 안 선생이 미국으로 망명한 후 태어났으며, 수산 안 역시 해외에서 독립 운동에 매진하고 있던 부친을 우러러보며 자랐다. 안창호 선생은 (의외로 구한말 시대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여성 문제에 있어 굉장히 열려있는 입장이었으며, 딸 또한 "한없이 여성스럽기 보다는 강하게" 자라기를 바랬다고 한다. 동시에 안 선생은 그의 네 자녀들에게 "항상 뿌리가 어디인지를 잊지 말되, 훌륭한 미국인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안 선생은 그녀가 열 살 남짓이던 무렵에 사라졌다. 잠시 조선으로 귀국했던 그를 일제가 체포했고, 1938년 옥중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1941년, 일본이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에 선제공격을 가하자 그녀는 미 해군에 입대를 결심했다. 이후 PBS와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자신의 입대 결심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조선인은 일본인들의 침략으로 조국을 잃었다. ... 그리고 이에 대항하다가 죽은 아버지가 있다면, 무슨 선택이 있었겠는가. 당연히 싸워야 한다."
수산은 진주만 공습 직후 미 해군 장교훈련학교에 지원했으나 탈락했다. 나중에 그녀는 왜 자신이 그 때 탈락했는지 따로 알아봤는데, 탈락 사유는 단지 자신이 "동양인"이기 때문에 탈락시켰음을 알았다. (※ 이 부분에서 이해가 좀 필요한데... 442 연대전투단의 경우에서도 보듯, 진주만 공습 직후 미국은 일본계 미국인들도 전부 캠프에 따로 격리했을 정도로 동양계가 일본에 협조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렇다고 포기할 성격이 아닌 그녀는 수병으로 입대했다.
그녀는 수병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며, 특히 대공포 훈련에서 성적이 뛰어났다. 그 덕에 그녀에게 장교 보수교육반 추천서가 주어졌고, 이번에는 장교 교육학교에서 그녀를 입교시켰다. 그리고 그녀는 미 해군 역사상 최초의 여군 함포장교로 보직됐다. 수잔 안은 치밀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상대해야 하는 적 항공기의 제원을 엔지니어들로부터 따로 받았으며, 항공기의 어느 부분을 노려야 할지, 어느 상황에서 어디를 쏴야 하는지를 따로 연구했다.
얼마 후 중위로 진급한 그녀는 해군 정보실(훗날의 NSA)로 보직되어 암호 해독장교로 활동했으며, 곧 암호해독국의 부서장으로 근무했다. 그녀 아래에서는 300명의 학자들이 암호 해독을 위해 일했는데, 그녀는 이 상황이 다소 웃기다고 훗날 주변에 회고했던 적이 있다. 그녀 자신은 (명문이고 하긴 어려운) 샌디에이고 주립대를 졸업했지만 그녀 아래에서 일한 이들은 전부 아이비 리그(Ivy League) 출신의 석학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처음 정보실에 보직됐을 때에도 다시 한 번 인종차별 문제가 있었다. 그녀가 아시아계이기 때문에 고급 정보를 취득해 일본에 협력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산 것이다. 하지만 정보실에서는 그녀에 대해 면밀히 검증했고, 결국 최고 등급의 기밀 취급 권한을 부여했다.
그녀는 1946년 중위로 전역했으며, 전역 후 해군 상사 출신인 남편 프랜시스 커디(Francis Cuddy)와 결혼했다. 그녀가 결혼하려던 때에도 또 한 번의 난관이 등장했다. 아직 미국에 잡혼(襍婚: 다른 인종간의 결혼, anti-miscegenation laws) 금지 법이 존재하던 시절이었고, 가족들도 백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두 난관을 넘어 결혼에 성공했다.
해군에서 전역한 후에도 그녀는 해군정보실의 후신인 국가안보국(NSA: National Security Agency)에 고용되었으며, 이 곳에서 소련 정부로부터 수집한 정보를 분석하는 업무를 맡았다. 그녀는 NSA에서 퇴직한 후 고향 LA에서 레스토랑을 열었으며, 이 곳에서 한인 이민자들을 독려하고 이끌었다.
수산 안 커디는 2015년 6월 24일,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모든 분야에서 선구자였던 그녀에 대해 아들인 필립 커디는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는 그저 문지방을 넘어 발을 걸쳐놓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항상 문을 활짝 열어 붙이셨고, 그 안으로 들어가 테이블 앞 의자에 앉기까지 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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