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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10. 1] 국공내전 종료...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 선포

라마막 2023. 10. 2. 11:52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이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성립을 선포했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 발발 전까지 중국은 장제스(蔣介石, 1887~1975)가 이끄는 국민당의 국민혁명군과 마오쩌둥이 지휘하는 공산군 간의 내전 상태였다. 공산군은 장시(江西)성에서 대패한 뒤 중국 외곽으로 크게 우회하는 경로로 퇴각한 통칭 '대장정(大長征)'을 거쳐 공산 진영을 복구했다.

일본이 중국을 침공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휴전에 들어갔으며, 일단 '공동의 적'에게 함께 대응하기로 한 '국공합작(國共合作)'에 들어갔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합작 역시 깨졌으며, 다시 오랜 대결을 끝내기 위한 2차 국공내전이 시작됐다.

2차 국공내전은 시작부터 국민당 측에 불리했다. 기본적으로 일본군을 상대한 주공(主功)이던 국민혁명군은 상하이 전투 등으로 주력을 소실당하고 일본군에 의한 병력피해를 크게 받았지만, 주로 게릴라 전법을 사용한데다 국민당을 상대할 것을 염두에 둔 공산군은 계속 전력을 보존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국민당은 인구의 가장 큰 할인 농부 계층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고, 이 때문에 지지기반이 흔들려 내전 수행에 차질을 크게 빚었다. 또한 군벌 조직을 이어붙여 탄생한 국민혁명군의 태생적인 약점도 여실히 드러나 지휘체계 문란과 들쭉날쭉한 훈련상태, 집중되지 못하고 계속 이해관계에 따라 흩어지는 전투목표 등으로 전선이 계속 붕괴했다. 결국 전쟁 수행에 한계가 있다고 본 국민당은 복건성 건너편에 위치한 섬인 타이완(臺灣)으로 퇴거했다.

국민당이 중국 본토를 버리고 퇴거하자 공산당이 그 공백을 장악했으며, 곧이어 사회주의 공산국가를 표방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타이완으로 피신한 국민당은 타이베이(臺北)에 임시수도를 설치한 뒤 중화민국(中華民國)의 명맥을 계속 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석이 된 마오쩌둥은 신 국가의 수도로 삼은 베이징(北京) 천안문 광장에서 국가 성립을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동지들이여, 오늘 이 곳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며, 이것이 중화인민의 유일한 정부임을 선언한다.'

이어서 마오쩌둥은 신 정부의 내각 명단을 발표했으며, 향후 국가의 통치체제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의용군 행진곡'을 국가(國歌)로 선포한 뒤 이 장소에서 최초로 연주했으며,  국기(國旗)로 삼은 오성홍기(五星紅旗)를 게양했다. 같은 날 베이징에서는 공산정부가 주도한 첫 군사 퍼레이드가 개선식을 하듯 열렸다.

중국 본토에서는 여전히 10월 1일을 국경일로 지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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