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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 9. 11] 칠레 군부 쿠데타 발생...피노셰 집권

라마막 2023. 9. 12. 20:06

1973년 9월 11일,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셰(Augusto Pinochet, 1915~2006) 장군이 민주적으로 당선된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 1908~1973) 정부에 대해 쿠데타를 일으켰다.

아옌데 대통령은 1970년 처음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아옌데는 칠레 사회당을 주축으로 성립된 좌파 동맹인 민중통합연합당의 당수였으며, 대선에서 세 명의 후보로 표가 갈리면서 아옌데가 당선되어 연립정권이 들어섰다. 그는 민주적으로 당선된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성향의 대통령이었다.

아옌데는 민주주의 자체를 존중하는 한편 자본주의가 낳은 최악의 부작용을 척결해보고자 노력했다. 그는 광산업을 주축으로 한 대형 산업을 국유화했고, 무상교육 범위를 넓혔으며, 칠레 극빈층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정책을 도입해 추진했다. 그의 정책은 우파 정당이 장악하고 있던 칠레 의회와 잦은 충돌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아옌데 당선 후 미국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실험"이 성공할 가능성을 우려해 칠레를 상대로 경제 전쟁을 벌였다. 미국은 특히 칠레 군부의 이데올로기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부는 1973년 6월 한 차례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실패했으나 '군부는 아옌데 정부에게 충성하지 않고 있다'는 메세지를 보여주기엔 충분했다. 이후 8월에는 군과 관련된 헌법 위기가 발생했는데, 이는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기 위한 충분한 명분이 되었다.

아우구스토 피노셰는 쿠데타 당시 칠레 최고 군권자였다. 그는 아옌데와도 만나 정부에 대한 군의 충성심을 약속했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맹세했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맹세를 깨고 9월 11일자로 쿠데타를 개시했다. 피노셰 휘하의 병력은 칠레 대통령 궁인 라 모네다(La Moneda)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으며, 곧 궁은 완전히 포위됐다.

사실상 더 저항이 불가능한 상황임을 깨달은 아옌데는 군부 정권에 대항해 칠레의 국민들이 계속 싸워줄 것이라 믿는다는 마지막 연설을 남겼다. 그리고 군 병력이 궁 안으로 난입해오기 시작하자 아옌데는 자리에 앉아 소총을 다리 사이에 끼고 총구를 턱 아래에 바짝 붙인 상태로 방아쇠를 당겼다.

쿠데타가 성공하자 피노셰는 군부 정권을 수립한 뒤 대대적인 정치적 숙청 작업에 들어가면서 3,000명에 달하는 이들의 인권을 유린한 후 처형했다. 1973년에 정권을 잡은 피노셰는 1993년까지 17년간 칠레를 통치했으며, 1988년 국민투표에서 56%가 피노셰의 권력 이양을 원하자 민간 정부에게 정권을 넘기고 퇴임했다.

: 퇴임 후에도 1998년 3월 10일까지 칠레 군 총사령관 직위는 계속 유지했으며, 사실상 민간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칠레 내에서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1998년 3월 10일에 노령을 이유로 총사령관 직위를 사임하고 상장(上將) 계급으로 전역했지만, 스스로 종신 의원 자격을 얻어 계속 면책특권을 유지했다.

그는 재임 중 사회주의자, 좌파, 정치 평론가 등을 주로 탄압해 최대 3,200명을 처형했으며, 최대 8만 명을 정치 수용소로 보내고 수십 만 명을 조사과정에서 고문했던 혐의를 받았다. 훗날 칠레 정부는 그의 17년 재임기간 중 실종된 사람만 3,095명이라고 추가했다. 그는 언론과 방송에 대해 광범위한 검열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는 은퇴 후 1998년 말 런던 여행 중 영국 정부에 의해 인권 유린 범죄 혐의로 인터폴 수배에 의거하여 체포됐는데, 그가 정치적으로 숙청했던 사람들 중 스페인 국적자들이 있어 스페인 정부가 국제 지명수배를 걸어놨던 상태였다. 이후 내내 영국과 스페인을 오가며 재판을 벌였으나 2000년 3월, 건강 악화를 이유로 석방되어 칠레로 귀국했으며, 2004년 칠레 법원에서 궐석 재판이 진행되어 그를 종신 가택연금형에 처했다. 하지만 그는 불과 2년 뒤인 2006년 12월 10일에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는 300건이 넘는 인권 유린 범죄로 기소되어 있었으며, 그 외에도 세금 탈루 혐의 등도 함께 걸려 있었다. 당시 법원에서 모은 증거에 따르면 그는 17년간 독재를 하면서 미화 약 $2,800만 달러의 재산을 축적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허가가 나지 않자 칠레 군부에서 군장(軍葬)으로 치렀지만, 칠레 정부는 국가 애도일을 선포하고 각군 부대에 조기 게양을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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