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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2차세계대전사

[1962] '독일에서 가장 치명적인 사나이', 모사드와 손잡다

라마막 2023. 5. 18. 00:56

독일군에서 "가장 치명적인 사나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오토 슈코르체니(Otto Johann Anton Skorzeny, 1908~1975). 오스트리아 태생인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SS 무장친위대 소속이었다. 그는 히틀러가 가장 친애한 특공대원이었으며, 연합군은 그를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라고 불렀다. 그는 2차대전 말엽 무사히 독일을 빠져나갔으며, 놀랍게도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Mossad)"에 마지막으로 협조하며 최후의 '더러운 일'을 처리한 후 어디론가 영영 사라졌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게릴라전에 특화된 인물이었으며, 특공대 스타일의 기습작전에도 능했다. 그는 194cm의 장신이었으며, 왼쪽 뺨에는 펜싱 결투 중에 생긴 깊은 칼자국이 있었다.

슈코르체니는 SS에 입대한 후 사관후보생 신분으로 히틀러 경호연대에 배속됐다. 194212, 그는 동부전선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지만 살아돌아왔으며, 전투의 공훈으로 생애 첫 철십자훈장을 받았다.

19437,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3(Votorio Emmanuelle III, 1869~1947) 국왕이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A. A. Mussolini, 1883~1945)를 총리에서 해임한 후 그를 구금했다. 히틀러는 그를 구하기로 맹세했으며, 통칭 "아이헤(Eiche, 떡갈나무)" 작전을 실시하여 슈코르체니를 비롯한 독일군 최고의 침투작전 전문가를 모았다. 이탈리아에 투입된 슈코르체니는 무솔리니가 비밀리에 구금된 위치를 추적하여 이탈리아 아브루초(Abruzzo) 지역 내 그란 사소(Gran Sasso) 산의 임페라토레(Imperatore) 호텔에 구금됐다는 것을 알아냈다. 슈코르체니는 글라이더를 타고 호텔을 급습하는 대담한 작전을 펼쳤으며, 불과 수 분 안에 무솔리니를 발견해 구출해 나왔다. 이 작전 중 희생된 독일군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슈코르체니의 활약에 고무된 히틀러는 그에게 대독일 기사훈장을 수여했다. 심지어 무솔리니 구출작전은 적국인 영국의 윈스턴 처칠(Sir Winston Churchil, 1874~1965) 총리마저 내용을 듣고 감명받았을 정도였다.

그는 2차세계대전이 종전하면서 연합군에게 체포됐으며, 다하우(Dachau) 전범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당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이 "침투" 전문가는 또 한 번 변장을 하고 탈출하여 흔적없이 사라졌다. 그는 1950년 독일에 우호적이던 프랑코(Francisco Franco Bahamonde, 1892~1975)가 지배하는 스페인으로 피신했으며, 그 곳에서 소리 소문없이 은거하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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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어느 날. 두 젊은 남녀가 스페인의 한 시골 마을에 찾아왔다. 네덜란드인이라고 밝힌 두 남녀는 여행 중이라면서 술집으로 들어왔으며, 바에서 슈코르체니 옆에 앉아 독일어로 말을 걸어 즐겁게 대화를 주고 받았다. 마침 오랫만에 독일어를 쓰게 된 슈코르체니 역시 모처럼 모국어로 떠들면서 그간의 외로움을 덜어내는 것 같았다. 슈코르체니는 시골 마을이므로 이들이 묵을 숙소를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으며, 자신은 혼자 살고 있으므로 자신의 집에 와서 묵으라고 권했다.

그리고 두 사람을 자신의 집으로 안내한 슈코르체니는 두 네덜란드인 남녀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을 잠가버리고 총을 꺼내 겨누며 말했다.

"자네들이 누군지 아네. 왜 왔는지도 알 것 같아. 안 그래?"

그러자 네덜란드인이라고 밝혔던 남성이 슈코르체니를 진정시키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저희는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 기관에서 나온 사람들이 맞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해치러 찾아온 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그럴 생각이었다면 굳이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기 전에 사살해버렸을 겁니다."

그러자 슈코르체니는 다소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대체 왜 찾아온건가? 난 맹세하건데 전쟁기간 중 유대인 학대나 학살에는 전혀 관여한 바가 없어!!"

남성이 대답했다. "우리는 당신에게 제안을 하나 하기 위해 왔을 뿐입니다...."

내용은 이랬다. 1960년 초, 이스라엘과 두 차례 붙었지만 패전한 아랍연맹은 구 독일의 미사일 과학자를 수소문해 미사일 전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어렵게 전후 동독에 숨어있던 한 과학자와 연결이 된 이집트 정부는 그와 비밀 거래를 통해 독일의 핵심 미사일 기술을 얻으려했고, 이 정보를 입수한 이스라엘 해외정보기관 '모사드'는 이 거래를 저지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의 과학자를 원하는 곳으로 끌어내 처치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과학자가 신뢰할만한 신원을 가진 사람이 필요했다. 이 때 모사드 내부에서 그동안 계속 추적을 하곤 있었지만 손을 대지 않고 있던 슈코르체니를 이용하자는 의견이 나온 것이다.

'네덜란드' 청년은 한참을 슈코르체니와 협상을 했으며, 마지막에는 이런 조건을 제시했다.

"당신이 미사일 기술을 중개 중이라고 한 뒤, 그 과학자를 우리가 지정한 인적없는 숲으로 불러내십시오. 거기까지만 하시면 우리가 뒷처리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섭섭하지 않게 사례를 해드리죠."

그러자 슈코르체니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돈은 필요없어. 뒷처리도 내가 해주지. 대신 조건은 하나일세. 이 건이 끝나면 두 번 다시 나를 추적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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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코르체니는 독일 뮌헨으로 이동했으며, 어느날 인적없는 숲속으로 가 한 남자와 만났다. 그의 이름은 하인츠 크루그(Heinz Krug). 그는 나치 과학자 출신으로 히틀러가 마지막까지 기대를 걸었던 미사일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다.

슈코르체니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어 그에게 확인시켜 주었으며, 가져온 서류가방을 보자고 말했다. 크루그가 슈코르체니에게 관련 서류를 보여주자 슈코르체니는 나직하게 한 마디 했다.

"그래. 잘 했소."

그리고 그 자리에서 크루그의 목을 꺾어버린 슈코르체니는 서류가방을 챙긴 뒤 어디론가 영영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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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다하우 군사재판을 통해 유대인 학살과는 관계없는 것으로 확인됐으나, 대신 영국 특수작전국(SOE) 요원인 F.F.E. -토머스(Yoe-Thomas, 1902~1964)가 독일에 침투시킨 영국 요원들을 슈코르체니가 살해하려 했다는 증언을 하면서 유죄가 나온 상태였다. 그는 사형 전까지 격리되어 있었으나 바이에른 농부로 위장하여 탈출했으며, 잘츠부르크와 파리를 거친 후 전범인도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큰 스페인으로 도주했다. 그가 은거 생활을 하던 당시 이집트의 낫세르(Gamal Abdel Nasser, 1918~1970)가 사람을 보내 이집트 군 군사고문관 자리를 제안했지만 거절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인 후안 페론(Juan Peron, 1895~1974/'에비타'의 남편)이 같은 자리를 제안했을 때는 이를 수락했다.

그의 모사드 협력 설에 대해서는 신뢰하기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왜냐면 당시 모사드 국장이던 이세르 하렐(Isser Harel, 1912~2003)은 모사드 요원들이 직접 크루그를 암살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인데, 사실 모사드 입장 역시 구 나치 대원과 협력했다고 공표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운 일이므로 하렐의 주장 역시 다소 신뢰하기가 어렵다.

그는 서유럽 여행이 사실상 불가한 상황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베르트 슈타인바허(Robert Steinbacher)와 오토 슈타인바우어(Otto Steinbauer)라는 가명으로 유럽 전역을 돌아다녔고, 비용 역시 오스트리아 정보기관에서 댔다는 이야기가 있다.

슈코르체니는 1970년 척추에 암이 발견되자 함부르크의 한 병원에서 제거 수술을 했지만, 수술이 잘못되면서 허리 아래로 마비가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다시 걷고야 만다는 일념으로 매일같이 재활치료에 전념하여 결국 반년 뒤 다시 걷게 됐다. 하지만 1975, 완치시킨 척추의 암이 폐로 전이 되었으며, 결국 스페인의 한 병원에서 다시 치료를 하던 중 6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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