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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1. 19] '리옹의 도살자' 클라우스 바르비, 볼리비아에서 체포되다

라마막 2023. 1. 20. 12:11

1983년 1월 19일, 독일의 전범자 클라우스 바르비(Klaus Barbie, 1913~1991)이 볼리비아 라파즈에서 체포됐다.

"리옹의 도살자"라는 별명이 있던 그는 게슈타포 지역 책임자였으며, 무장친위대(SS) 대위 출신이었다. 그는 7,500명의 유대계 프랑스인과 프랑스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체포했으며, 그 중 4천 명 이상을 처형한 혐의를 받았다.

1947년, 그는 미국의 방첩부대에 항복했다. 그는 항복 조건으로 독일이 수집한 반 공산당 관련 정보를 제공하기로 했으며, 그 대신 자신의 신분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정보의 가치가 작지 않다고 판단한 미국은 그의 제안을 수락하고 1949년 신분을 바꾼 후 남미로 이주시켰다.

비교적 조용히 살던 그는 1971년 볼리비아의 우고 반세르 수아레즈(Hugo Banzer Suarez, 1926~2002) 대통령에게 협력해 정적들을 격리하는 정치범 수용소 설립을 도왔다. 바르비는 신분이 발각되며 1983년 프랑스로 범죄인 인도절차를 거쳐 송환됐으며, 반인륜 범죄 혐의로 사형을 구형 받았다. 하지만 결국 종신형으로 감형된 그는 프랑스 감옥에서 복역하기 시작했으나 1991년 9월 25일에 옥중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 볼리비아로 갔을 때 클라우스 알트만(Klaus Altman)이라는 가명을 썼으며, 성공적인 사업가로 살고 있었다.

그는 2차대전 중 프랑스 왕정이 감옥으로 사용하던 몽뤼크(Montluc) 요새를 레지스탕스 대원 수감시설로 전용했으며, 이 곳에서 오랜시간 포로들을 고문하며 정보를 빼낸 것으로 알려졌다. 증언 중에는 그가 망치로 포로의 얼굴을 내리치며 얼굴 뼈를 부수는 와중에도 자신의 군복에는 피가 튀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는 이중성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비밀을 불지 않는 레지스탕스 리더를 넝마가 될 때까지 고문하다 죽인 전례도 있으며, 1944년에는 이지외 난민 수용소에서 유대인 아동만 44명을 색출해 아우슈비츠로 보내기도 했었다.

바르비는 1944년 8월, 연합군이 리옹으로 진격하자 마지막 유대인 650명을 아우슈비츠로 기어이 보낸 뒤 독일로 탈출했으며, 이후 지하조직을 결성한 뒤 전범들의 해외 도주를 도왔다. 하지만 미군 방첩대에게 결국 꼬리를 잡히게 되자 그는 그간 소련 쪽에서 수집한 정보를 미국에 제공했고, 게슈타포 출신인 그의 경력을 높이 산 미국은 활용가치가 높다고 판단해 정식 요원으로 채용한 뒤 소련과 독일 점령지에서 그를 활용했다.

결국 이를 파악한 프랑스 정부가 강력히 항의하며 바르비를 넘기라고 미국을 압박하자 미 정부는 그를 해외로 내보내기로 했으며, 1951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신원을 세탁한 뒤 남미로 도주했다. 볼리비아에 정착한 그는 아마존 일대의 임산물 판매업에 손을 댔으며, '클라우스 알트만'으로 개명한 후 곧 볼리비아 국적을 취득했다. 그는 곧 볼리비아 군부와 친밀해졌으며, 군부정권이 반정부 인사 탄압에 나서자 적극협력하다가 정권의 주요 인사로 떠올랐다. 그는 특히 정보 수집과 조사분석, 고문 방식을 전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사업이 궤도에 올라서자 메데인(Madelin) 카르텔과도 거래했다.

한편 그의 행방을 계속 추적한 프랑스는 궐석 상태로 두 번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러던 중 독일 전범을 계속 추적하던 독일의 언론인인 베아테 클라르스펠트(Beate Klarsfeld, 1939~)가 알트만이 바르비라는 추측을 제기했고, 이에 프랑스의 방송인인 라디슬라 드오요(Ladislas de Hoyos, 1939~2011)가 그를 심층 취재하기 시작했다.

드오요는 1972년 2월 3일 알트만과 인터뷰를 성사시켰다. 사전에 준비된 질문만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지만 드오요는 인터뷰 말미에 갑자기 '리옹에 가보신 적이 없는지' 불어로 물었다. 이에 알트만은 황급히 가본적이 없다고 독어로 답했지만, 이로써 알트만이 불어를 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드오요는 알트만에게 바르비를 모르냐고 묻자 모른다고 답했고, 바르비가 죽인 레지스탕스 지도자 장 물랭의 사진을 내밀었으나 여전히 모른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드오요는 알트만의 신원을 확인할 지문을 얻었다.

드오요의 돌발행동을 본 볼리비아 정부는 인터뷰 롤을 압류하려 했으나 그는 이미 롤을 대사관을 통해 빼돌리고 빈 롤을 넘겼으며, 지문이 묻은 사진은 프랑스 당국으로 넘겨져 알트만이 바르비라는 사실을 확정하는 결정적 물증이 되었다. 하지만 볼리비아 정부의 비호를 받던 바르비는 프랑스 정부의 송환 압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 곳에서 버텼다.

1982년, 볼리비아 군부정권이 무너지면서 상황이 뒤바꼈다. 신임 에르난 실레스 수아소(Hernan Siles Zuazo, 1914~1996) 대통령은 프랑스와 관계 개선을 도모하던 중 바르비 문제가 떠오르자 그를 범죄인 인도로 넘기기로 동의했다. 프랑스는 그를 넘겨받자 일부러 그가 과거에 포로 고문장소로 썼던 몽뤼크 교도소에 투옥했다.

이후 재판에는 백 여명이 넘는 증인이 나타나 그의 잔악한 범죄를 증언했으며, 프랑스 법원은 1987년 7월 4일에 바르비에 대해 종신형을 선고했다.

하지만 바르비는 죽을 때 까지도 자신의 행위를 사과하거나 후회하지 않았으며, 이렇게 1991년까지 4년간 복역하다가 옥중에서 옥사하고 말았다. 응당 그가 받았어야 할 죄가에 비해서는 평온한 죽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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