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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4. 29] LA 흑인 폭동 발생...코리아타운 등 대규모 피해

라마막 2023. 5. 1. 10:04

1992년 4월 29일, LA 도심에서 벌어진 LA 폭동사태 중의 모습. 흑인인 로드니 킹(Rodney King)이 경찰에 체포되는 과정에서 과잉 폭력을 당한 정황이 비디오로 공개되면서 시작된 이 폭동은 흑인 인종 분규 형태로 터져나왔다.

로드니 킹 사건 이전에도 LA 경찰은 경찰청장이던 데릴 게이츠(Daryl Gates)의 지휘 하에 소수민족에 대해 폭력적인 과잉 대응을 해오고 있다는 불만이 쌓이고 있었으며, 그 중 특히 흑인 공동체가 가장 불만이 컸다. 노골적인 인종 차별 외에도 강경진압 정책에 따라 LA 경찰이 '군대화' 된다는 지적도 이어지고 있었으며, 이는 결국 과잉진압을 낳아 문제가 발생했다.

1991년 3월 3일, 로드니 킹은 고속도로 상에서 경찰 추격을 벌인 뒤 체포당했다. 경찰은 세워진 차에서 두 명을 하차시켜 경찰차로 옮겨 태웠으나, 운전석에서 저항하던 로드니는 강제로 끌려나온 후 스테이시 쿤(Stacey Koon), 로렌스 파월(Laurence Powell), 티모시 윈드(Timothy Wind), 시어도어 브리세노(Theodore Briseno), 롤란도 솔라노(Rolando Solano) 다섯 경관에게 폭행 당했다. 당시 장면은 현지 주민이던 조지 할리데이(George Holliday)가 촬영하고 있었으나 경관들은 이를 몰랐다.

사건 후 LA 검찰은 다섯 경관을 과잉 진압 및 폭행 혐의로 기소했으나, 백인 아홉 명과 혼혈인 한 명, 라틴계 한 명, 아시아계 한 명으로 구성된 아홉 명의 배심원단은 그 중 두 명의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배심원단에 흑인이 없는 것이 의도된 것이 아니냐는 흑인 사회 내의 불만 여론이 곧 고조됐고, LA 전역에서 흑인 주도 시위가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방화와 약탈이 만연했지만, 워낙 광범위한 시위 범위 때문에 경찰력만으로는 대응이 어려웠다.

결국 진압능력의 한계를 느낀 LA 경찰은 연방정부에 진압권한을 위임했다. 이에 지역 인근의 모든 사법기관(FBI, DEA, USSS, 연방보안관 등) 인원 5,000명이 동원되어 진압을 시작했고, 끝에는 캘리포니아 주 방위군과 미 육군 정규군까지 투입됐다.

이에 사태가 진압되기 시작했으나 주요 타겟이 된 코리아타운은 여러 가게가 방화 피해를 입거나 약탈을 당했고, 이에 베트남전쟁 참전자 중심으로 자체 자경단이 구성되어 '루프탑 코리언즈(Rooftop Koreans)'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이 소요 사태 중 총 63명이 사망했으며, 부상자는 2,838명에 이르렀다. 이 사건 후 논란의 중심이던 게이츠 청장은 초기 진압 실패 책임으로 사임했다.

LA 폭동 사건은 경찰의 과잉진압 문제가 환기된 첫 사건이었으며, 인종 간의 분규 갈등, 특히 흑-백 뿐 아니라 흑-한국계 간의 갈등도 표면화 된 사건이었다. 이 뿌리깊은 인종 간의 갈등 뿐 아니라 경찰-흑인 사회 간의 알력관계 역시 해결되지 못하고 있으며, 2020년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가 또 다시 경찰 체포 과정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터지자 유사한 흑인 시위사태가 재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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