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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5. 10] 북한의 '황태자' 김정남, 위조 여권으로 도쿄 디즈니랜드 방문 시도 중 적발

라마막 2023. 5. 11. 11:32

나리타에서 위조여권으로 체포된 당시의 김정남.

2001510, 북한의 독재자 김정일(金正日, 1941~2011)의 장남인 김정남(金正男, 1971~2017)이 가짜 여권을 가지고 일본 도쿄(東京)의 나리타(成田) 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던 중 적발됐다.

당시 그는 두 여성과 4세 정도의 사내 아이를 대동하고 있었으며, 일부 언론에서는 그 소년이 이복동생 김정은(金正恩, 1982?~)이라고 보도했으나, 관계당국의 분석에 따르면 소년은 김정남의 아들로 분석되나 이 아이가 김정남의 여섯 자녀 중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당시 김정남의 여권은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발행한 가짜 여권이었으며, 중국계로 위장하고 있던 그의 여권에 기재된 이름은 '팡슝(胖熊: 뚱뚱한 곰이라는 뜻)'이었다.

위조여권이 발각되자 김정남 일행은 일본 당국에 의해 구금됐다. 김정남과 일행은 취조 과정에서 일본에 입국한 이유로 도쿄 디즈니랜드(Disneyland)에 방문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일본 측은 이 사건이 외교문제로 비화할 조짐이 있지만 북한의 적대성이 깔린 사건이 아니라고 판단하면서 김정남과 일행을 이들의 출발지인 중국으로 국외 추방했다.

이 사건은 애초부터 해외에서 북한 정권과 다소간 거리를 두고 살던 김정남이 벌인 개인적 '일탈'에 가까웠으나, 이로 인한 정치적 파장은 작지 않았다. 사실상 이 사건 때문에 김정일의 잠재적 후계자였던 김정남이 김정일의 눈 밖에 났고, 결과적으로 막내 동생인 김정은이 차기 후계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이 사건을 망신스러운 치욕이라 생각했고, 이 때문에 평소 큰 아들로 애착이 있던 김정남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체포 당시 사용된 위조 여권.

김정남은 결국 이후 북한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김정일 사후 배 다른 동생인 김정은이 정권을 승계하자 김정남은 해외를 떠돌았으며, 2017213,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 내에서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국적의 두 여성이 VX 신경작용제를 손에 바르고 다가와 김정남의 얼굴에 갑작스럽게 도포해 살해했다. 사건 직후 체포된 인도네시아 여성인 시티 아이시아(Siti Aisyah)와 베트남 여성인 도안 티후옹(Đoàn Thị Hương)TV 리얼리티 쇼에 고용됐다고 속아 범행을 저질렀다고 증언했으며, 결국 20193월에 둘 다 석방됐다.

: 평양 태생으로, 김정일의 동거녀였던 성혜림(成蕙琳, 1937~2002)의 아들이다. 하지만 성혜림의 존재를 김일성(金日成, 혹은 김성주[金成柱], 1912~1994)으로부터 감추던 김정일은 김정남을 성혜림의 언니인 성혜랑(成蕙琅, 1935~/1996년 유럽 모처로 망명)에게 맡겼으며, 청소년기에는 소련 모스크바로 유학을 보냈다가 다시 스위스에서 공부를 시켰다. 이 때문에 그는 일찍부터 서방 세계와 실제 북한의 국제적 위상에 대해 일찍 눈을 떴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94년부터 2001년까지 사실상 김정일의 잠재적 "후계자"였으며, 주로 해외를 다니면서 북한의 '자금'을 모으는 역할을 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디즈니랜드' 사건이 그가 몰락하게 된 결정적인 트리거 역할을 하긴 했으나, 이미 앞서부터 장성택(張成澤, 1946~2013)과 친밀한 관계였던 데다 지속적으로 북한 개혁을 주장해왔던 것이 김정일의 심기를 건드려 왔던 것으로 분석된다.

한편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김정일과 흡사하다는 증언이 있다. 성혜랑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남은 성격이 급하고, 예민하며, 예술 감각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성혜랑이 2000년 경에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승계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영화나 예술 쪽 일을 하고 싶어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어려서부터 짧은 영화 시나리오 등을 썼다는 증언이 있으며, 김정일도 그를 위해 작은 영화 촬영세트를 지어줬다고 한다.

그는 1998년부터 사실상 후계자 작업에 들어가면서 사회안전성 고위직에 앉았으며, 북한 인민군에서도 대좌 계급을 받았다. 그는 2001년 김정일이 상하이의 IT 관련 기업들을 시찰할 때 그를 수행하고 다니면서 중국 고위 관료들과 김정일을 통역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김정남은 북한 '김씨왕조' 가계에 있으면서 보기 드물게 한국이나 서방 외신과 간간히 대화를 하던 드문 인물이었다. 2001년에는 AP(Associated Press)지와 마카오에서 간단한 인터뷰를 했으며, 당시 그가 유럽으로 망명할 가능성이 있다는 일각의 추측을 부정하면서 "전혀 망명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2012114일에는 인천대학교 교수를 포함한 한국인들이 베이징발 마카오 행 에어차이나(Air China) 항공편에 탔을 때 스스로 와 인사를 하고 신분을 밝혔으며, '보통 혼자 여행 다닌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2010년경 김정은이 사실상 후계자로 내정되면서 부터 평양에 접근하지 않았으나, 김정일이 열차에서 급사하자 20111217일에 비밀리에 평양으로 귀국해 마지막으로 부친의 시신을 대면했다. 하지만 이미 정권이 동생에게 넘어간 데다 북한 자체가 적대적인 환경이 되어 있었고, 후계 구도를 놓고 온갖 억측이 나돌던 상태였으므로 스스로의 신변을 우려해 장례식 자체에는 참석하지 않고 마카오로 급히 돌아왔다. 이후 그는 최대한 김정은의 북한 정권과 거리를 두면서 "따로 살겠다"는 의향을 밝혔지만, 결국에는 쿠알라룸푸르에서 암살로 생을 마치고 말았다. 아마도 그의 생존은 어떤 식으로든 북한 정권의 잠재적 위협 요소가 될 가능성이 될 것으로 판단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KLIA)에서 암살당하던 당시의 김정남. 기둥 앞에 서 있던 그에게 흰 옷을 입은 여성이 갑자기 다가가 얼굴에 VX제를 도포하는 모습이 보인다. 도포당한 그는 경찰에 신고한 후 곧장 화장실로 가 닦아 냈지만, 결국은 호흡곤란을 겪다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그는 두 명의 아내와 첩을 한 명 두고 있었으며, 관계 당국에서 파악한 자녀의 숫자만 최소 여섯 명이다. 그의 사후 첫 아내인 신정희(1980~)는 베이징 외곽으로 이주해 룽위안(龙苑) 빌라에 거주 중이며, 두 번째 아내인 리혜경(1970~)은 아들 김한솔(1995~), 딸 김솔휘(1998~)와 함께 마카오의 12층 아파트에 거주했었으나 김정남 사후 사라진 상태다. 그 중 김한솔은 '천리마 민방위'라는 단체와 함께 일종의 반정권 운동을 하고 있다고 유튜브 등을 통해 밝힌 바 있다. 김정남의 첩인 서영라(1980~)는 고려항공 스튜어디스 출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각에서는 북한 대남공작부 소속 공작원으로 근무했던 이력이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그녀 역시 마카오에 거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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