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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근세사

[일본사] 전장의 꽃, 일본의 여성 사무라이들

라마막 2022. 12. 25. 11:33

일본 전통 갑주를 걸친 여성 사무라이인 '온나무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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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는 남성형 단어지만, 일본의 무사(부시, 武士) 계급 중에는 여성도 있었다. 이들은 이들은 흔히 "온나무샤(女武者)"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실제로 크고 작은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5803, 다케다 가쓰요리(武田 勝頼, 1546~1582)와 호조 우지마사(北条 氏政, 1538~1590)-후우마 코타로(風魔 小太郎, ?~1603) 연합군 간에 벌어진 오모스(重須) 전투에서 전사한 시신을 훗날 DNA 테스트로 검사한 결과, 105개의 시신 중 35개가 여성의 시신이었던 것으로 확인했다.

: 주로 "남성의 영역"인 군사 분야에서 여성 무사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겐페이(源平)전쟁(1180~1185) 때로, 헤이안 시대 말 두 유력 가문인 다이라() 가문과 미나모토() 가문이 충돌한 전쟁이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인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 헤이케 모노가타리)"는 비록 가상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미나모토 노 요시나가(源 義仲, 1154~1184)의 딸인 토모에 고젠(巴 御前)이 요시나가를 지원하여 미나모토 요리토모(源 頼朝, 1147~1199)를 아와주 전투에서 격파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시기의 여걸 중 대표적인 실존인물로는 미나모토 요리토모의 실제 아내인 호조 마사코(北条 政子, 1156~1225)가 있다. 그녀는 내전에 앞서 남편이 결단을 못 내리자 직접 갑옷을 가져와 남편에게 입히며 독려한 것으로 유명하며, 가마쿠라 막부 성립 후에는 절에 들어갔지만 실질적으로 비구니의 신분으로 일본을 통치해 "비구니 쇼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본격적인 여성 무사가 등장한 시기는 아시카가 막부(足利幕府, 1336~1573) 시대, 통칭 '전국시대', 대표적으로 기록된 여성 무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1543~1616)의 가신이던 혼다 다다카쓰(本多 忠勝, 1548~1610)의 딸이자 사나다 노부유키(真田 信之, 1566~1658)의 아내가 된 고마쓰히메(小松姫, 1573~1620)가 대표적이다. 뿐만 아니라 도요토미(豊臣) 가문이 망하게 된 상황이 되자 국주인 히데요리(豊臣 秀頼, 1593~1615)의 어머니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 秀吉, 1537~1598)의 처인 요도도노(淀殿, 1567~1615)는 직접 갑옷을 걸치고 최후의 방어전을 지휘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인구는 희소한 상황에서 가문을 지켜야 하는 중소 다이묘(大名)이나 씨족들이 여성을 전쟁에 동원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는 불교계 종파로 오다(織田) 가문에 대항하던 불교 종파인 일향종( 一向宗)이나 총포술에 전문화 되어 있던 스즈키(鈴木) 가문의 사이카 잇키(雑賀一揆) 등이 있다. 전국시대 기간에는 여성이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다수의 기록이 존재하며, 예를 들면 붕고 지역의 다이묘인 오토모(大友) 가문의 가신인 요시나가 묘린(吉岡妙林)이라는 여성무사가 3,000명의 시마즈(島津) 가문 병사들과 싸운 기록이 존재한다. 또한 오시(忍城) 전투 때에는 아카이 테루코(赤井輝子, 1514~1594)의 손녀이자 나리타 우지나가의 딸인 카이히메(甲斐姫, 1572?~?)가 오다와라 성으로 침공한 히데요시에 맞서 싸운 기록이 있으며, 이 때 나리타 가문은 그녀를 칭송하면서 "동일본에서 둘도 없는 미녀(東国無双美人)"라고 기록했다. 그 외에도 훗날 "일본의 잔다르크"로 평가받는 이요 지방의 쓰루히메(鶴姫, 1526~1543) 등도 전쟁터에서 활약한 기록이 존재한다. 이마가와(今川) 집안의 가신인 이이오 쓰루타츠(飯尾 連龍, ?~1565)의 아내인 오타즈 노 카타(田鶴, ?~1568)는 오케하지마 전투에서 이마가와 군이 혼란에 빠지면서 남편이 전사하자 대신 부대를 지휘했다.


전통적으로 일본에서 여성의 지위는 매우 낮은 편이었으며, 여성은 아내이자 어머니의 역할까지만 기대받았다. 특히 전국시대에는 가문의 정략을 위한 도구나 승자의 '전리품'이 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통상적으로는 여성이 가문을 상속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지만, 그 가운데서 이이 나오토라(井伊 直虎, ?~1582)처럼 가문을 승계할 남성이 전혀 없자 여성이 집안을 상속한 드문 사례도 존재한다.

하지만 전국시대 후기로 가면서 무사로 활약하는 여성들이 조금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시즈가타케 전투나 코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200명의 뎃포(소총)부대를 지휘한 이케다 센(池田せん, ?~?)은 다이묘 이케다 데루마사(池田 輝政, 1565~1613)의 누나였지만 전장에서 활약한 경우였다.

전국시대 이후부터는 특히 여성 무사층의 확대가 두드러진다. 이는 특히 무사 계급이 더 이상 전쟁과 직결되지 않은 고위 귀족층이 되면서 고착화 됐다. 하지만 19세기 중반부터 아이즈 전쟁, 보신전쟁 등 사회적 개혁과 혼란이 커지기 시작하자 이미 무사층에 진출해 있던 여성들이 활약했으며, 후쿠시마 지역의 아이즈(会津)번의 경우 여성으로만 구성한 '조시타이(娘子隊)'라는 여군 부대를 창설하고 나카노 타케코(中野 竹子, 1847~1868)를 대장으로 앉혔다. 훗날 그녀는 메이지 유신이 성공한 후 일본의 첫 여성 시민운동가로 활동했다.

일본 역사상 "마지막" 여성무사로 기록된 인물은 니이지마 야에(新島八重, 1845~1932)이다. 무사이기에 앞서 의료인이자 학자였던 그녀는 총포술에 능통했다고 알려졌으며, 보신 전쟁에 참여하여 아이즈 번 방어를 위해 활약했다. 훗날 신 정부가 성립된 뒤 러-일 전쟁과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그녀는 간호사로 참전했으며, 두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황실 귀족 가문이 아닌 여성으로 사상 첫 훈장을 수훈받은 인물이 되었다. 그녀는 만년을 여성 운동가이자 교육가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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