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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2. 1. 6] 전장의 성녀(聖女) 잔다르크 출생

라마막 2023. 1. 6. 01:00

<오늘의 역사> 1412. 1. 6

604년 전 어제인 141216, 프랑스의 "성녀(聖女)" 잔다르크가 태어났다.

"오를레앙의 처녀(La Pucelle d'Orléans)"라는 별명이 붙으며 백년전쟁 막판을 수놓은 그녀는 말 그대로 혜성같이 등장했다가 혜성같이 사라졌다. 평범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미켈란젤로 대천사, 마르가리타 성녀, 카트린느 성녀의 계시를 받고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를 돕기 위해 자원했으며, 영국군에게 절대 열세에 몰려있던 프랑스군을 이끌고 전세를 뒤집는데 성공했다.

백년전쟁은 1337년에 영국-프랑스 간에 발발하여 주로 프랑스 본토에서 전쟁이 치러졌지만, 아직 프랑스는 흑사병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데다 장거리 무기체계의 열세 때문에 영국군에게 연패를 거듭했다. 심지어 잔다르크가 전장이 등장하기 전까지 수십년 동안 프랑스 군은 이렇다 할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잔다르크가 등장할 무렵이 됐을 때 이미 프랑스 북부-북동부는 모두 영국-부르고뉴 연합군에게 점령당해 있었으며, 주요 도시인 파리와 루엥 등도 모두 영국군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특히 랭스(Reims)가 넘어간 것도 큰 타격이었는데, 프랑스 국왕은 전통적으로 이 곳에서 대관식을 치러왔기 때문에 잔다르크 당대에 국왕이 된 샤를 7세는 공식적으로 국왕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자끄 다르크와 이자벨 다르크 사이에서 태어난 잔 다르크는 당시의 바(Bar) 공국령의 레미에서 태어났다. 사실 정확하게 그녀가 몇 년에 출생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녀는 훗날 영국에서 재판을 받을 당시 자신이 열 아홉 살이라고 진술했기 때문에 1412년 생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열 셋이 되던 해에 집 정원 앞에서 계시를 받았으며, 미켈란젤로 대천사는 그녀에게 "영국군을 프랑스에서 몰아내고 랭스를 되찾아 국왕을 즉위하도록 도우라"고 명령 받았다. 그녀의 진술에 따르면 "그들이 하도 아름다웠기 때문에 세 성인의 모습이 사라진 후 그 자리에서 한참 울었다"고 한다.

그녀는 열 여섯이 됐을 무렵 영주와 친분이 있는 친척에게 부탁해 보쿨뢰르 장군에게 왕실 궁정에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했으나 당연히 거부당한다. 수차례 계속 청원을 넣던 그녀는 왕실이 보고받기 전 루브레 전투의 경과를 미리 예측해 맞춤으로써 보쿨뢰르 장군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고, 그는 소수의 기사를 그녀에게 붙여주어 시농성의 샤를 왕세자를 만나게 주선해주었다. 왕세자는 "계시"를 받았다는 그녀를 떠보기 위해 일부러 시종 한 명과 옷을 바꿔입고 말단 자리에 서서 그녀를 받아들였으나, 잔다르크는 주저하지 않고 접견장에 들어서자마자 왕세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당시 샤를 왕세자는 급작스럽게 부왕이 서거했음에도 즉위를 할 수 없었고, 심지어 영국군에게 연전 연패를 당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거의 자포자기한 상태로 시농 성에서 은거 중이었다. 이 와중에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잔다르크의 등장은 그에게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왕세자는 수년간 포위상태가 지속 중인 오를레앙의 포위를 풀기 위해 잔다르크를 급파했으며, 그녀는 한 걸음에 하사받은 갑옷을 걸치고 오를레앙으로 첫 출격했다.

프랑스 군에 있어서도 그녀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오랜 연패와 영국군의 유린으로 지친 그들 앞에 나타난 "성녀"는 전 장병의 사기를 북돋고 애국심을 끌어올렸다. 그녀의 등장에 힘입은 프랑스군은 열세의 상황을 극복하고 오를레앙을 되찾는데 성공했으며, 승세를 이어 그대로 랭스까지 되찾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랭스를 되찾자마자 계시 받았던 대로 왕세자를 모셔와 곧장 대관식을 거행하고 "샤를 7"로 즉위시켰다.

하지만 랭스를 되찾고 즉위식을 거행한 샤를 7세는 이후 소극적인 자세로 돌아섰다. 잔다르크는 파리를 탈환하고 영국군을 대륙 위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샤를 7세는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오히려 대중 앞에서 계속 인기가 치솟는 그녀를 질투하기 시작했다. 이에 잔다르크는 홀로 분투하며 영국군과 싸웠으나 귀족 세력 조차도 그녀의 혜성같은 등장을 시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군대를 홀로 방치했고, 결국 잔다르크는 콩피에뉴에서 패하면서 부르고뉴 군에게 체포당했다.

부르고뉴 군은 그녀의 몸값을 받고 영국군에게 팔았으며, 영국은 다시 엄청난 석방금을 프랑스에게 요구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녀의 존재를 은근히 시기하고 있던 샤를 7세는 이 요구를 묵살해버렸다. 그녀는 영국 법정에서 일곱 차례나 재판을 받았으며, 영국은 남성 복장을 하고 있는 그녀의 옷을 뺏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그녀를 괴롭혔지만 끝까지 그녀는 '계시'를 받았다는 진술을 번복하지 않았다. 결국 잔다르크는 영국이 원하는대로 덮어씌운 마녀, 이교도, 우상숭배 혐의 등으로 화형이 선고됐다.

1431530, 그녀는 루앙의 한 광장에서 화형대에 묶여 올라갔다. 그녀는 사제들에게 부탁해 그녀 앞에 십자가를 놓아 달라고 했고, 한 영국군 병사는 그녀를 화형할 나무조각 일부를 이용해 그녀 앞에 십자가를 만들어주었다. 화형 후 영국군은 그녀의 불탄 시신을 일부러 조각내어 '그녀가 살아서 도망쳤다'는 소문이 나지 않게 확인했으며, 그녀의 재는 모두 세느 강에 뿌려버렸다.

그녀는 이렇게 쓰러졌지만, 뒤이은 프랑스 장군들의 등장과 애국심으로 단결한 장병들의 덕, 그리고 뒤늦게 그녀의 죽음으로 정신차린 샤를 7세 덕에 전세가 서서히 뒤집히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은 프랑스 본토에서 축출됐으며, 1453년에 가서야 양국이 평화협정을 체결하면서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후 교황 갈리스토 3(Callixtus III)1453년 종교재판소 대법관 장 브레할과 잔다르크의 모친인 이자벨 로메의 요청을 받고 잔다르크에 대한 재판을 다시 열었으며, 샤를 7세의 뒤늦은 지원에 힘입어 종교재판소는 그녀의 마녀 혐의를 번복하고 복권시키게 되었다. 그녀의 위상은 프랑스가 국가로 정립된 16세기에 더 올라갔으며, 오를레앙 대주교는 1849년 경 교황청에 그녀의 시복을 청원하여 1909'복자'가 되었다. 이후 1920년에는 교황 베네딕토 15세에 의해 시성되어 '성녀 잔다르크'가 되었다.

: 참고로 일부 기록에선 그녀가 100년 전쟁 이후에도 생존 이 존재한다. 한 지방 관료가 그녀의 "화형" 수십년 후에 기록한 내용인데, 이름을 밝히지 않은 여성이 (잔다르크의 고향인) 레미 지역으로 방문했었다고 함. 그녀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름을 끝끝내 밝히지 않았으나 잔다르크 생전 함께 활약했던 병사와 귀족들이 그녀를 알아보았고, 그녀는 간단한 볼일을 본 후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의 추측은 영국-프랑스가 모종의 거래로 그녀를 석방한 후 다른 사람을 처형했으며,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살다가 아마도 밀린 급여 등을 받기 위해 잠시 상경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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