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오늘의 역사

사진과 함께 살펴보는 세계 속 이야기

인물사 111

[1944. 6] 독일 군복을 입은 의문의 조선인 포로, 양경종

오래 전부터 논란이 되어 온 사진. 장동건, 오다기리 조가 주연한 2011년작 《마이웨이》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던 내용이다. 참고로 그가 처음 "한국인"이라는 단서도 이 사진 뒷면에 사진 촬영자가 취조 과정에서 들은 이름인 '양경종(Yang Kyoungjong)'을 영어로 휘갈겨 써놔 처음 알려졌음. : 2차 세계대전 중 3개국 군복을 입었던 것으로 알려진 유일한 한국인 병사의 모습. '양경종'은 조선 출신으로, 최초 일본군에 입대했다가 소련군에게 생포됐고, 소련군에 입대해 대독(對獨) 전선에 투입됐으며, 다시 독일군으로 입대해 노르망디를 방어하다가 미군에게 생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2차 세계대전 발발 전 양경종의 행적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나, 단지 알려진 것은 그가 조선 출신이고, 2차 세..

[1994. 7. 8] 북한의 통치자 김일성 사망

1994년 7월 8일, 북한의 김일성(金日成, 1912~1994) 주석이 사망했다. 20세기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그는 해방 후 혼란기에 소련의 비호를 받으며 북한에 입성했으며, 표면적으로는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세습제의 왕조나 마찬가지인 '김씨(金氏) 조선'을 만들었다. 그는 사실상 신성 불가침의 절대 왕조를 수립해 권력을 휘둘렀지만, 그의 최후와 관련해서는 아직도 여러가지 추측이 혼재한다. 특히 말년에는 아들 김정일(金正日, 1997~2011)에게 권력 싸움에서 패해 실권을 상실한 상태였고, 이미 후계작업이 완료된 상태였기 때문에 '암살설'과 '사망 방치설' 등이 존재한다.1994년 7월 8일 오전, 김일성은 향산군(香山郡)에 세워 놓은 초대소(별장)에 있다가 심..

현대사 2023.07.08

[1998. 6. 30] '무명의 용사'로 오인받은 미군 조종사, 이름을 되찾다

1972년, 베트남 공화국군(ARVN: Army of the Republic of Vietnam) 정찰대가 미군 A37 지상 공격기 추락 지점을 정찰하던 중 시신 일부를 수거해 미군에 전달했다. 당시 베트남 공화국 군은 해당 지점에서 미군의 신분증, 군번 줄, 가족 사진이 들어있는 지갑, 조종복과 권총집 일부를 함께 수거해왔으며, 당시 신분증에는 마이클 블라시에(Michael Blassie) 미 공군 중위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 당시 베트남으로부터 이 물건들을 인수받은 윌리엄 파넬(William Parnell) 대위는 이 물건들을 군번줄로 감아 플라스틱 박스에 넣은 후 태국에 설치한 미 수색회복본부로 넘겼으며, 다시 이 물건들은 하와이에 위치한 미 육군 중앙 신원확인 연구소(US Army Centra..

[1951. 6. 30] 30명의 패잔병과 단 한 명의 여성이 고립된 '아나타한 섬 사건'

1951년 6월 30일, 마리아나 해구의 한 작은 섬인 아나타한 섬에서 약 30명의 일본군 병사와 수병들이 미 해군에 항복했다. 종전 후에도 항복을 거부하고 이 섬에서 6년 넘게 버티던 이들은 인원 수가 많은데다 섬에서 어느 정도 자급자족이 가능해 버틸 수 있었지만, 섬에서 코코넛 술을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되고 단 한 명 밖에 없는 여성을 두고 내부 투쟁이 벌어지면서 계급체계 자체가 흐릿해진 상태였다. : 하도 충격적인(!) 사건이라 불과 2년 뒤인 1953년에 이라는 영화로 제작됐다. 이들은 세 척의 좌초한 일본군 함정에서 살아남은 이들이며, 원래 1945년 종전 당시 미군이 마리아나 제도에 도착하면서 생존자들 및 섬 원주민들을 섬 밖으로 한 차례 이송했다. 하지만 이 서른 명은 일본이 패망했다는 사실..

[1858. 6. 18] 인류학자 찰스 다윈, 첫 출판으로 진화론을 알리다

1858년 6월 18일,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의 이름이 알프레드 러셀 월러스(Alfred Russell Wallace, 1823~1913)가 쓴 연구논문을 통해 처음 이름이 알려졌다. 월러스의 논문은 다윈과 별개의 연구과정을 통해 다윈의 과 유사한 결론에 도달했으며, 이에 따라 다윈은 '진화론'의 출판을 결심하게 된다. 다윈은 1831년부터 1836년까지 '자연선택론(theory of natural selection)'에 대해 연구했으며, 이 기간 중 갈라파고스(Galapagos) 제도로 떠나는 영국 왕립해군 탐사대에 합류해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갈라파고스에 체류하는 동안 다윈은 지질학자로 활동했지만, 그 곳에서 목격한 야생동물과 채집한 화석을 보면서 당혹감을 감추지..

근대사 2023.06.19

[1929. 6. 12] 홀로코스트 희생자인 '안네 프랑크'와 그녀의 일기

1929년 6월 12일은 독일이 네덜란드에서 자행한 홀로코스트(Holocaust) 피해자인 안네 프랑크(Anne Frank, 1929~1945)의 생일이었다. 안네 프랑크는 나치 당이 독일에서 떠오르기 시작하던 시점에 독일의 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은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반 유대계 정책을 하나 둘 씩 표방하기 시작하자 1934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곧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하면서 이들 가족 역시 네덜란드 안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1941년, 안네 프랑크의 가족은 국적을 말소 당하고 무국적자 신분이 되었다. 1942년부터 유대인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이들 가족은 이사를 가는 척 한 뒤 안네의 아버지인 오토 프랑크(Otto Frank, 1889..

[2004. 6. 5] 레이건 前 미 대통령 서거

2004년 6월 5일,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1911~2004) 前 미 대통령이 서거했다. 향년 93세였으며 사인은 폐렴이었다. 그는 잭 레이건(Jack Reagan, 1883~1941)과 넬 윌슨(Nelle Wilson, 1883~1962)의 차남이었으며, 차분하고 온건한 가정 환경에서 성장했다. 대학을 졸업한 그는 라디오 스포츠 중계가가 되었으며, 곧 워너 브라더스(Warner Brothers)사와 계약을 해 전속 관계가 되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직접 참전했으며, 전쟁 기간 내내 전쟁부 산하에서 공보 영화를 촬영했다. 레이건은 처음 영화배우 제인 와이먼(Jane Wyman, 1917~2007)과 결혼해 슬하에 모린(Maureen Reagan, 1941~2001)과 마..

현대사 2023.06.06

[1917. 5. 29] 존 에프 케네디 미 대통령 출생

1917년 5월 29일, 존 에프 케네디(John F. Kennedy) 대통령이 미국 매사추세츠 주 브루클라인(Brookline, MA)에서 출생했다. 보스턴 지역의 백만장자인 조셉 케네디(Joseph Patrick Kennedy, 1888~1969)와 로즈 피츠제럴드(Rose Fitzgerald, 1890~1995)의 둘째 아들인 존은 태어날 때부터 부와 매력, 총명함, 그리고 잘생긴 외모의 축복을 받았다. 그는 사립 초우트 로즈메리 홀(Choate Rosemary Hall)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하버드 대학교로 진학했으며, 졸업 직후 해군에 입대했다. 그는 등쪽의 부상이 심각했음에도 2차세계대전 중 장교로 임관하여 PT 보트를 지휘했고, 일본군 함정과 충돌해 보트가 가라앉게 되자 생존 장병들을 이끌고..

현대사 2023.05.30

[1947] 소련이 처형한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어쩌면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이 중 하나지만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 비톨트 필레츠키(Wiltold Pilecki, 1901~1948)는 폴란드 육군 출신의 정보장교로, 아우슈비츠(Auschwitz) 수용소에서 자행된 나치 독일의 대규모 학살 행위를 파헤친 인물이다. 필레츠키는 이미 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폴란드로 쳐들어온 소련군, 리투아니아군, 독일군과 싸웠다. 그는 기술이 좋은데다 계산이 정확한 인물이었으므로 정보를 수집한 후 이를 토대로 적에게 확실한 사보타주를 가했다. 그는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독일군의 유대인 대학살, 통칭 홀로코스트(Holocaust) 정황을 처음으로 포착한 인물이다. 필레츠키는 폴란드가 독일-소련에 나뉘어 점령당하자 지하 저항세력인 폴란..

[1941. 12. 7] 진주만 기습을 지휘한 일본 해군 항공대장

후치다 미쓰오(淵田美津雄, 1902~1976) 대위는 일본 해군 항공대 소속이었으며, 2차대전 이전부터 종전 시기까지 폭격기 관측사였다. 그는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을 실시했을 당시 일본 기습함대의 제 1파(派)를 지휘했던 인물로 가장 잘 알려졌다. 이 날 그는 나구모 주이치(南雲 忠一, 1887~1944) 중장이 지휘하는 기습함대의 항공 전력 전체를 관장했다. 종전 후 그는 기독교로 개종해 전도사가 되었으며, 미국과 유럽을 다니면서 자신의 경험담을 설파했다. 그는 말년에 미국으로 이주했으나 미국 국적을 취득하지는 않았다. 그가 전후에 밝힌 회고담은 사실 신빙성 문제 때문에 역사가들이 종종 의구심을 갖는 편이다. 특히 진주만에서 2파 공격이 끝나자 후치다 자신은 3파 공격을 주장했지만 나구..

현대사 2023.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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