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오늘의 역사

사진과 함께 살펴보는 세계 속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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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2차세계대전사 131

[1940. 5. 10] 네덜란드 강습을 위해 수송기에 오르는 독일 공정부대원들

독일 제 22 강습보병사단 병사들이 1940년 5월 10일 네덜란드 침공에 앞서 뮌스터에서 Ju-52 항공기에 오르고 있는 모습. 독일군은 525대의 Ju-52를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 5월 전쟁 중 대부분을 파손당했다. 독일은 네덜란드 공격을 시작하면서 275~350대의 항공기를 잃었으며, 이들 기체는 대부분 수리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이들 기체 대다수는 방공포나 전투기에 격추당한 것이 아니었으며, 비상 착륙 중 파괴되거나 점령한 적 활주로에 폭격을 하던 중 네덜란드군 야포나 보병의 사격에 맞아 추락한 경우가 가장 많았다. 발켄베르크(Valkenburg) 활주로에서는 35대 가량의 Ju-52가 착륙 중 늪지에 소실됐는데, 워낙 무거운 Ju-52가 부드러운 늪지 위에 비상착륙 하다가 그대로 땅 속으로 빨..

[1945. 5. 7] 독일,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문서 서명

1945년 5월 7일, 독일군의 알프레드 요들(Alfred Jodl, 1890~1946) 대장이 연합군의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 중인 모습. 요들은 사실 소련의 잔학한 보복이 예상됐으므로 서방 연합군(미-영-자유프랑스)에게만 항복을 하고 전쟁을 끝내보려 했으나, 연합군 최고사령관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1890~1969) 원수는 이를 거부하고 연합군 전체에 대한 조건없는 항복을 선택하지 않을 시 독일군이 서방 연합군에게 항복하는 것을 수리하지 않고 소련군에게만 항복을 허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요들은 히틀러의 뒤를 이은 칼 되니츠(Karl Donitz, 1891~1980) 원수와 이 문제에 대해 상의했으며, 되니츠는 요들로 하여금 서방 연합군 측이 요구하는대로 무조건 ..

[1945. 5. 7] 캐나다 해군 우간다 함, 태평양전쟁 참전 여부를 놓고 승조원 찬반투표

1945년 5월 7일, 독일이 항복함에 따라 캐나다 해군 경순양함 우간다(HMCS Uganda)에서 태평양 전역에 참전할 것인지를 정하는 투표를 실시해 과반 이상의 수병이 참전 반대표를 던졌다. 캐나다 정부는 유럽에서 전쟁이 끝나자 오로지 자원자에 한해서만 태평양 전역으로 보내 계속 싸우게 하겠다고 발표했으며, 이에 우간다 함장은 수병들에게 투표를 실시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투표결과 과반 이상의 수병이 참전 반대표를 던지자 함장은 이들을 "루저"라고 부르며 비난했고, 이 때문에 6월이 됐을 때는 참전 반대표를 던진 수병보다 더 많은 수병이 군과 재계약을 거부했다. 결국 우간다 함은 수병들을 하선시키기 위해 캐나다로 귀환 명령을 받았으며, 중간 급유를 위해 하와이에 기항했다. 그리고 이들은 하와이에서 냉..

[1945. 5. 2] 베를린 시청에 깃발을 거는 소련군 병사 사진의 뒷이야기

1945년 5월 2일, 소련군이 독일 제국의회의사당 건물 위에 소비에트 깃발을 걸고 있는 모습. 이 "제국의회의사당에 깃발을 거는 소련군" 사진은 상징으로 가득할 뿐 아니라, 역사적인 순간을 담고 있기도 하다. 제국의회의사당은 1894년에 건립된 건물로, 당시 건축기술과 건축적 미학이 담긴 시대의 정수였다. 이 건물 자체가 역사성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의 붉은 군대는 이 의사당을 '적의 상징'으로 삼고 있었다. 소련군 병사가 깃발을 거는 이 예브게니 칼데이(Yebgeny Khaldei, 1917~1997)의 사진은 아마도 이오지마에서 미군 병사들이 모여 성조기를 일으켜 세우고 있는 조 로젠탈(Joe Rosenthal)의 사진 다음으로 유명한 2차 세계대전의 대표적 사진일 것이다. 사실 칼데이의 이 사..

[1942. 5. 8] 미 해군항모 렉싱턴 함, 산호해 전투 후 침몰

미 해군 항모 렉싱턴(USS Lexington, CV-2) 함에서 승조원이 퇴함한 후 불타오르고 있는 모습. 일본군 공격에 타격을 입고 몇시간 뒤에 촬영된 사진이다. 1942년 5월 8일, 산호해 전투 중 미 해군 항모 렉싱턴과 요크타운(USS Yorktown, CV-10)함은 일본 측 항모인 쇼가쿠(翔鶴) 및 즈이카쿠(瑞鶴)함과 격돌했다. 미측은 즈이카쿠 함에 치명타를 입혔으나 일측 함재기 역시 렉싱턴 함을 반파시켰다. 일본군은 11:05분경 미측 항모를 발견했으며, 먼저 B5N(연합군 코드네임 '카이트') 편대가 공격을 가했다. 그동안 위에서부터 급하강 공격을 준비하던 D3A는 상공에서 계속 돌고 있었다. 미측은 일본군 급강하폭격기를 발견하고 공뢰(항공어뢰)를 투하하기 전에 4대를 격추했다. 하지만 ..

[1944. 4.] 2차대전 말 미국에서 제작한 아시아지역 전도

1944년 4월경 미국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잡지에서 제작한 동아시아 지역 지도. 정확하게는 지도 하단 제목에 으로 표기되어 있다. 지도 우측 확대한 부분은 일본의 산업시설 밀집지역을 따로 그린 것이다. 국경 표시를 보면 중국 본토와 만주를 별개 지역으로 나누어 놓았으며, 일본열도-한반도-대만 역시 당시 정세에 따라 일본으로 표기해놓았다. 한반도 지명도 일본식으로 기재된 것이 눈에 띄는데, 아마 당시 입수 가능한 지도는 전부 일본에서 제작한 지도였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서울은 게이조(경성/京城), 인천은 진센, 대구는 타이큐, 군산은 군잔, 대전은 타이덴, 제주도는 사이슈토로 표기했으며 사이슈토 아래에는 서양에서 통용되던 제주도의 이름인 켈파트(Quelpart)가 병..

[1946. 5] 포로가 된 병사들을 위로한 명견, 디킨 훈장 수상

포인터 순수혈통인 "주디(Judy)"는 태평양 위에서 활약한 몇몇 함정에서 마스코트였으나, 1942년에는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포로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 주디는 그 곳에서 만난 항공병인 프랭크 윌리엄스(Frank Williams)와 얼마 안되는 배급 쌀을 나눠먹는 사이가 되었다. 주디는 연합군 포로들이 사기를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독이 있는 뱀이 수용소 안에 들어오거나, 악어나 호랑이 같은 맹수들이 근처에 접근해도 크게 짖어 동료들에게 알렸다. 포로들은 얼마 후 싱가포르로 다시 이송됐는데, 포로들은 주디를 쌀포대에 몰래 넣어 함께 이동하며 그녀의 존재를 끝까지 간수들에게 들키지 않았다. 하지만 수송선은 이동 중 연합군의 어뢰에 맞았다. 윌리엄스는 주디를 구하기 위해 선체가 가라앉기 전에 그녀를..

[1944. 9. 9] 혁혁한 전과에도 이어진 불운 끝에 사라진 잠수함, 스캠프 함

1944년 9월 9일, 하와이 제도 해안에서 훈련 중이던 미 해군 가토(Gato)급 잠수함인 스캠프(USS Scamp, SS-277)함과 위크스(Wickes)급 구축함인 츄(USS Chew, DD-106)함이 충돌했다. 당시 사고는 스캠프 함이 한창 물 속에서 부상하던 도중 수면 위의 위크스 함을 보지 못해 발생한 사고였다. 스캠프는 부상하던 중 충돌한 바람에 선수 부분이 크게 파손됐다. 이후 스캠프는 진주만으로 가 한참 동안 수리했으며, 10월 16일에야 다시 출항이 가능해 졌으므로 여덟 번째 항해에 나섰다. 하지만 스캠프는 운이 없는 배였다. 1944년 4월, 이번에는 필리핀 민다나오 섬 인근에서 수상기가 투하한 폭탄에 크게 맞았고, 아마도 이 때까지 적 폭탄에 맞고도 살아남은 모든 연합군 함정 중에..

[1939. 4. 18] 훈련 후 아리아케 만에 부상한 일본해군 I-71 잠수함

일본 해군의 이(伊)형 잠수함인 I-71함이 훈련 후 부상한 모습. 앞에는 I-73함과 I-72함이 보인다. 1939년 4월 18일에 아리아케(有明) 만 앞에서 촬영된 사진. I-71함은 고베(神戸)에 있던 가와사키(川崎) 조선소에서 건조했으며, 1933년 2월 15일에 착공하여 1934년 8월 25일에 진수했다. I-71함은 1935년 12월 24일에 건조가 끝나 취역했으며, 취역 후 구레(吳) 해군조병창에 배치됐다. 일본 해군은 테평양 전쟁이 임박하자 I-71함을 'Z 작전'에 투입해 진주만 공습에 참가시키고자 했다. 이에 따라 I-71함은 제 3 잠수함전대 20 잠수함대대에 배치하려 했으나, 작전 단행 직전에 편성이 변경되면서 제 6함대 전방원정단에 배치됐다. 1941년 11월 11일, I-71함은..

[1945. 9. 8] 2차세계대전 패전 후 귀향 열차를 기다리는 일본 육군 병사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후 약 540만 명의 일본 육군 병사와 180만 명의 일본 해군 수병이 연합군 포로로 사로 잡혔다. 전쟁 막판에 본토 공습을 당한 일본은 파괴된 인프라 뿐 아니라 1946년에 찾아온 대 기근 때문에 식량이 심각하게 부족했고, 거의 700만 명의 포로를 잡고 있던 연합군 역시 구 일본군 포로와 민간인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어려웠다. 한편, 종전이 선언된 뒤에도 태평양 일각에서는 항복하지 않고 버틴 일본군 병사들이 남아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1974년 3월에 가서야 항복한 필리핀 루방 섬의 오노다 히로( 小野田 寛郎, 1922~2014) 중위가 있었고, 바로 9개월 뒤인 1974년 12월에는 인도네시아 모로타이 섬에서 저항하던 나카무라 테루오(中村 輝夫,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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