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오늘의 역사

사진과 함께 살펴보는 세계 속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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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2차세계대전사 131

[1940. 7] 영국을 멸망시켜라!! 나치독일의 '바다사자' 작전

1940년 독일이 입안한 영국 본토 강습 양륙작전, 통칭 "바다사자(Sea Lion)" 작전 계획도. 이 작전은 영국 경제가 악화되면 항공기 가동률이 저하하는 시점에 독일공군 루프트바페가 제공권을 뺏으며, 이후 왕립해군에 대한 대규모 폭격으로 영국 해군을 격멸시킨 뒤 영국에 상륙한다는 것이 작전의 골자였다. 동, 서 유럽을 석권한 나치 독일은 서유럽의 마지막 저항세력인 영국을 정복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영국의 정복은 미국의 참전의지를 완전히 꺾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했으므로 무엇보다 중요했다. 유럽 대륙의 집결지 역할을 할 수 있는 영국이 없다면, 미국 본토에서부터 직접 유럽을 공격하는 것은 거리 부담이 늘어나 보급선 유지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물론 바다를 건너 공격해야 한다는 부담이..

[1940] 네덜란드 해변에서 오토바이 시험 중인 독일 병사들

1940년, 독일 무장친위대(SS) 소속 병사가 네덜란드 스케브닝언(Scheveningen) 해변에서 모터사이클을 시험해보고 있는 모습. 해안에 배치된 독일 병사들은 북해를 따라 모터사이클로 종종 달리면서 민첩성 연습을 하곤 했다. 이 지역은 전쟁 초반에 상대적으로 조용한 편이었으며 연합군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으므로 한적했다. 실제로 이 시기에 해변에서 근무하던 독일 병사들은 독일본토에서 카메라를 사와 휴일마다 촬영을 해 가족들에게 보내곤 했다. 2차세계대전 초반부터 독일 국방군이 현대적인 모터사이클을 사용했다는 것은 와전된 이야기에 가깝다. 1940년 초, 서유럽으로 침공한 독일군의 공세세력 중 차량화 된 병력은 10%(157개 사단 중 16개)에 불과했다. 이 시기만 해도 독일군 상당 수는 기동..

[1945. 2. 13] 격파된 독일군 돌격포 뒤에 은폐 중인 자유폴란드 병사들

영국군에 배속된 제 2 폴란드 군단 3 '카르파티아(Carpathian)' 라이플 사단 2여단 5대대 1중대 1소대원들이 격파된 독일군 돌격포 뒤에 은폐한 상태로 2인치 박격포를 장전 중인 모습. 뒤에는 통신병이 웅크린 상태로 통신 연결을 시도 중인 모습이 보인다. 이 사진은 1945년 2월 13일, 파엔차(Faenza)에서 촬영됐다. 이들은 정찰부대로, 세니오(Senio) 강 남쪽 언덕으로 정찰을 하던 중 적과 조우했다. 사진 속에 격파된 돌격포는 이탈리아제 세모벤테(Semovente) 75/18의 파생형으로, 정식 명칭은 세모벤테 M42M 75/34이다. 이 차량은 기본적으로 세모벤테 75/18 M41에 75mm L34 브레다(Breda) 포를 장착한 형상으로, 대전차 공격 능력을 향상 시킨 차량이다..

[1941. 9] 동부전선 이동을 준비하는 독일군 스페인 자원병 사단

1941년 9월, 동부전선 전개를 준비 중인 스페인 출신 구성부대인 '청색부대'원들의 모습. : 스페인어 명칭 때문에 '아줄(Azul)' 사단으로도 알려져 있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스페인 출신의 나치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구성한 부대이며, 주로 동부전선에 전개됐다. 사단 정식 명칭은 독일국방군 제 250 보병사단이었으며, 파견한 스페인 측에서는 '스페인 육군 자원 사단'으로 지정하고 있었다.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 장군은 스페인 내전(1936~1939)에서 국민파를 이끌고 승리하면서 권력을 장악한 상태였다. 정권 장악 후 프랑코는 연합국-추축국 어디에도 가담하지 않은 '중립'을 표방했으나,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 독일로부터 전격적인 지원을 ..

[1929. 6. 12] 홀로코스트 희생자인 '안네 프랑크'와 그녀의 일기

1929년 6월 12일은 독일이 네덜란드에서 자행한 홀로코스트(Holocaust) 피해자인 안네 프랑크(Anne Frank, 1929~1945)의 생일이었다. 안네 프랑크는 나치 당이 독일에서 떠오르기 시작하던 시점에 독일의 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은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반 유대계 정책을 하나 둘 씩 표방하기 시작하자 1934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곧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하면서 이들 가족 역시 네덜란드 안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1941년, 안네 프랑크의 가족은 국적을 말소 당하고 무국적자 신분이 되었다. 1942년부터 유대인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이들 가족은 이사를 가는 척 한 뒤 안네의 아버지인 오토 프랑크(Otto Frank, 1889..

[1942] '간지 폭발(!)'의 코트를 걸친 독일공군 장교

독일공군 제 77 급강하 폭격 비행단(StG77) 지휘관인 클레멘스 그라프 폰 쇤본-비젠타이트(Clemens Graf von Schönborn-Wiesentheid, 1905~1944) 백작(소령)의 모습. 1942년 러시아 남부 어디에선가 촬영된 사진이다. : 2차 세계대전 중 주로 추축국의 유고슬라비아 전역에 참가한 인물. 독일공군(루프트바페)에서 활약하며 종전까지 대령을 달았다. 1934년 독일 국방군(육군)으로 입대했으나 1년 뒤 독일 공군으로 전군했으며, 1936년 3월 전임자이던 테오 오스테르캄프(Theo Osterkamp, 1892~1975) 소령(최종 계급은 소장)이 보직을 옮기자 제 132 "리히트호펜(Richthofen)" 전투비행단(JG 132) 4 전투비행대대장에 보직됐다. 1937..

[1942. 6. 1] 요크타운 항모, 미드웨이로 이동하며 긴급 수리 실시

1942년 6월 1일, 미 해군 항모 요크타운 함(USS Yorktown, CV-5)이 진주만을 출항해 미드웨이로 출항했다. 당시 요크타운은 산호해(Coral Sea) 해전 중 심각하게 파손을 입었으므로 승선인원 1,400명이 48시간동안 조를 짜 돌아가면서 긴급 수리를 실시했다. 일본은 산호해에서 요크타운에게 치명타를 입혔으므로 분명 그 자리에서 가라앉았거나, 최소 중(重)수리를 실시하느라 미드웨이에 투입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48시간동안 수리를 마친 요크타운은 미드웨이에 등장했을 뿐 아니라, 이날 미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기까지 했다.

[1940. 12. 31] 제빵중대로부터 받은 빵을 먹는 독일군 병사들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이 운용하던 제빵중대(Backereikompanie)로부터 빵을 배분 받은 독일군 병사의 모습. 1940년 12월 31일 동부전선에서 촬영된 사진으로, 병사들이 배분 받은 빵을 쪼개 먹고 있는 모습이다. 빵은 아침 및 저녁 식사에서 칼로리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독일군 식단에서 중요했다. 따라서 1개 사단이 매일 같이 충분한 "빵"을 공급하는 일은 사실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독일군은 1개 사단 예하에 각 3개 '제빵' 중대를 설치했으며, 이들 부대에는 2개의 오토바이와 1개 마차가 배치됐다. 1개 중대는 2개 제빵 분대로 구성됐으며, 이들 중대에는 모두 유지 정비 소대가 하나씩 붙어있어 필요한 집기 류를 정비했다. 이들 중대와 분대의 인원 수는 사단 형편에 따라 달..

[1947] 소련이 처형한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어쩌면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이 중 하나지만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 비톨트 필레츠키(Wiltold Pilecki, 1901~1948)는 폴란드 육군 출신의 정보장교로, 아우슈비츠(Auschwitz) 수용소에서 자행된 나치 독일의 대규모 학살 행위를 파헤친 인물이다. 필레츠키는 이미 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폴란드로 쳐들어온 소련군, 리투아니아군, 독일군과 싸웠다. 그는 기술이 좋은데다 계산이 정확한 인물이었으므로 정보를 수집한 후 이를 토대로 적에게 확실한 사보타주를 가했다. 그는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독일군의 유대인 대학살, 통칭 홀로코스트(Holocaust) 정황을 처음으로 포착한 인물이다. 필레츠키는 폴란드가 독일-소련에 나뉘어 점령당하자 지하 저항세력인 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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