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오늘의 역사

사진과 함께 살펴보는 세계 속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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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2차세계대전사 131

[1942. 2. 19] 美 대통령, 행정명령 9066호 서명...미 서부해안 재미 일본인 격리 개시

진주만 공습이 벌어진 직후, 미국 서해안 지역에 살고 있던 재미 일본인들이 적국이 된 일본에 협력하여 '제5열' 노릇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자 루즈벨트 행정부는 대통령 행정명령 9066호로 미 서부해안에 거주 중이던 약 110,000명의 재미 일본인들을 격리하도록 조치했다. 이들 중에는 미국 시민권자가 71,000명이 있었고, 상당 수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왔기 때문에 "미국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음에도 이들의 소명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 이 재미 일본인 격리 정책과 관련해 『이코노믹 리뷰』지에 실렸던 내용: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무렵 나치 독일은 국내와 점령지에서 유대인 혈통을 가진 이들을 따로 분류해 ‘게토’ 지구에 격리했으며 전쟁 중후반기에는 강제 수용소에서 최대 추산 약 1..

[1945. 4. 17] 네덜란드 레지스탕스 여성대원, 종전을 3주 남기고 처형 당하다

1945년 4월 17일, 네덜란드 오베르베인(Overveen)에서 촬영된 야네트여 요하나 스하프트 (Jannetje Johnanna Schaft, 1920~1945), 애칭 '하니 스하프트 (Hannie Schaft)의 모습. 그녀는 네덜란드 레지스탕스 대원이었다. 2차 세계대전 말, 그녀는 독일군에게 체포된 뒤 오베르베인의 해안가로 끌려나와 총살형에 처해졌다. 독일군 병사는 그녀의 머리를 겨누고 총을 당겼으나 이 첫 발은 그녀를 죽이지 못하고 부상만 입혔다. 바닥에 쓰러졌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방아쇠를 당긴 병사를 돌아보며 조롱조로 한 마디 했다. "내가 쏴도 너보다는 잘 쏘겠다." 결국 처형당한 그녀는 그 자리에 매장됐으며, 시신은 전후에 이장되어 다른 421명의 레지스탕스 대원들과 함께 블루멘달(B..

[1945. 5] 오키나와 전투 중 전사한 아들을 전장에서 애도하는 미군 대령

1945년 5월, 오키나와에서 아들인 마이크 펜턴(Mike Fenton 1925~1945) 일병의 임시 장례식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 중인 미 해병대의 프랜시스 펜턴(Francis Fenton) 대령의 모습. 이 사진은 해병대 전통을 따른 한 가족이 연루된 오키나와 전투의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을 담은 사진이다. 프랜시스 I. 펜턴 대령(준장 예편)은 1917년 8월 미 해병대에 병사로 입대했다. 그는 계급을 하나씩 단계적으로 밟아 올라가 1944년 7월 미 제 1해병사단 공병장교로 임관했다. 그는 1사단에 소속되어 펠리리우 전투에 참가해 동성훈장을 수상했으며, 그 직후 이 오키나와 전투에 투입됐다. 펜턴 대령이 상급부대로 올라간 동안 그의 막내아들인 마이클 펜턴은 1943년 8월 17일 미 해병대에 입대해..

[1941. 5. 20] 크레타 전투에 최초로 공정부대를 전장에 투입한 독일군

1941년 5월 20일 오전 8시, 융커스(Junkers) Ju-52 병력수송기에 탑승한 독일 공정부대원들과 글라이더로 날아온 750명의 병력이 크레타(Crete) 섬의 수다 만과 말레메 활주로로 습격해왔다. 이들은 우선 활주로 인근 강둑에 교두보를 확보한 후 진지를 구축했다. 독일군 제2파는 그날 오후 16시 15분과 17시 30분 경에 다른 활주로 두 곳으로 강하했다. 그 과정에서 1,850명의 독일 공정병들이 하늘 위에서, 혹은 땅에 착지한 후 연합군 병력 및 무장한 크레타 민간인들에게 학살당했으며, 부상자는 헤아릴 수도 없었다. 독일의 프라이베르크(Freyberg) 장군은 전세를 잘못 읽고 있었으므로 추후 실시할 대규모 상륙작전을 고려해 야포전력과 예비대 투입을 거부하다가 피해를 키웠다. 말레메 ..

[1944] 40대에 군문에 합류한 소련 최고의 저격수, 세묜 노모코노프 병장

소련군의 세묜 노모코노프(Semyon Nomokonov) 병장의 모습. 그는 시베리아 에벤크(Evenk) 족 출신 저격수로, 2차대전 중 주로 동부전선에서 싸웠으며 공식 저격 기록만 367회를 남겼다(독일군 358, 일본군 9). 그는 '타이가 샤만(Taiga Shaman)'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세묜은 7살 때 처음 총을 잡고 사격을 배웠으며, 산양이나 순록등을 잡으며 실력을 닦았다. 개전 당시 40대였던 그는 소련 제 221사단 저격수로 합류했으며,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동 프로이센, 만주 등지에서 싸웠다. 그가 주로 사용한 총은 1891 모신나강이었으며, 보통 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난 시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조준경을 믿지 않았으며 어려서 자신이 배운 사격법대로 쏘는 것을 선호했다...

[1962] '독일에서 가장 치명적인 사나이', 모사드와 손잡다

독일군에서 "가장 치명적인 사나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오토 슈코르체니(Otto Johann Anton Skorzeny, 1908~1975). 오스트리아 태생인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SS 무장친위대 소속이었다. 그는 히틀러가 가장 친애한 특공대원이었으며, 연합군은 그를 "유럽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라고 불렀다. 그는 2차대전 말엽 무사히 독일을 빠져나갔으며, 놀랍게도 이스라엘 정보기관인 "모사드(Mossad)"에 마지막으로 협조하며 최후의 '더러운 일'을 처리한 후 어디론가 영영 사라졌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게릴라전에 특화된 인물이었으며, 특공대 스타일의 기습작전에도 능했다. 그는 194cm의 장신이었으며, 왼쪽 뺨에는 펜싱 결투 중에 생긴 깊은 칼자국이 있었다. 슈코르체니는 SS에 입대한 후..

[1945. 5. 15] 항복하는 독일의 유보트를 감시하는 미군 최초의 제식 헬리콥터

1945년 5월 15일, 미 해군이 독일의 U-858함을 나포한 직후 촬영한 사진. 이미 해당 함의 함장은 4일 전에 항복 의사를 밝혔으며, 항복을 수리한 미 해군은 계속 전진 항해하여 미국 델라웨어 주 포트 마일스(Fort Miles, DE)까지 이동하도록 명령했다. 사진은 포트 마일스에 도착한 후 독일 승조원들이 하선하고 미 해군 수병들이 함을 인수하는 모습이며, 상공에서는 미군의 HNS-I 헬리콥터가 인수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이 헬리콥터는 미군이 사상 처음으로 편제장비로 도입한 헬리콥터이다. : HNS-I 헬리콥터는 시콜스키(Sikorsky, 現 록히드-마틴)에서 제작한 헬리콥터로, 처음 제작 목적은 항공기 조종사 훈련 용도였다. 복좌식으로 설계된 이 초창기 형태의 헬기는 이고르 시코르스키(Ig..

[1941. 4. 15] 선물 배달 중 격추 기록을 추가한 독일 공군 에이스 아돌프 갈란트

1941년 4월 15일, 독일 공군('루프트바페') 조종사인 아돌프 갈란트(Adolf Galland, 1912~1996)가 테오 오스터캄프(Theodor Osterkamp, 1892~1975) 장군의 생일선물로 랍스터와 샴페인을 배달하기 위해 이륙 준비 중인 모습. 갈란트는 프랑스 르 투케(Le Touquet)에 주둔 중이던 오스터캄프 장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프랑스로 출발했다. 그는 독일에서 출발해 프랑스로 향하던 중 자신의 윙맨과 함께 경로에서 잠시 이탈해 영국 근처까지 날아가 왕립공군 전투기를 찾았다. 갈란트는 도버(Dover) 해안의 절벽 인근에서 스핏파이어 편대를 발견하고 이들에게 다가갔다. 갈란트는 윙맨과 함께 스핏파이어를 공격해 두 대를 격추했으며, 추가로 한 대를 더 맞췄으나 추락여부까..

[1943. 5. 11] 2차대전 중 유일하게 미국 영토에서 벌어진 지상전인 아투 전투 개시

1943년 5월 11일, "아투(Attu)" 작전 간 토머스 킨케이드(Thomas C. Kinkaid) 소장이 지휘하는 제 16 기동함대는 북태평양의 차가운 안개를 헤치고 미 제 7보병사단 소속 3,000여 장병을 알류산 열도에 상륙시켰다. : 사실 따지자면 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유일하게" 미국 영토에서 싸웠던 전투. 알류산을 방어한 일본군은 야마자키 야수요(山崎保代) 대좌가 지휘하는 2,650명의 방어전력으로 섬을 수비했으나 미군이 상륙을 시도하자 해안에서 차단하는 대신 섬 안쪽으로 들어가 벙커를 파고 들어갔다. 미 서부방어사령관인 존 드윗(John DeWitt) 대장은 앨버트 브라운(Albert Brown) 소장이 지휘하는 7 보병사단 예하의 17보병연대를 상륙부대로 지정해 급파했다. 유진 랜드럼..

[1945. 5. 10] 항복 후 미군 장성과 기념촬영을 한 독일공군 케셀링 원수

1945년 5월 10일, 연합군에게 항복한 이튿날 함께 기념촬영을 한 알베르트 케셀링(Albert Kesselring) 독일국방군 원수(중앙), 맥스웰 테일러(Maxwell D. Taylor) 미육군 소장(우측, 101 공정사단장), 그리고 제럴드 히긴스(Gerald J. Higgins) 미 육군 준장(좌측, 101 공정사단 부사단장)의 모습. 케셀링 원수는 육군 출신이지만 개전 후 공군으로 전군하면서 독일공군 루프트바페(Luftwaffe) 총장을 지낸 인물로, 항복 당시 제1 항공군 군사령관으로 재직 중이었다. 그는 1945년 5월 9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인근 잘펜델(Saalfendel)에서 미 101 공정사단에 항복했으며, 테일러 소장은 그와 한 차례 면담 후 케셀링 원수를 매우 정중하게 예우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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