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오늘의 역사

사진과 함께 살펴보는 세계 속 이야기

전쟁사/625전쟁사 33

[1950. 10. 19] 터키 제 1 여단, 대한민국 도착 후 UN군에 합류

*어제자 UN사 홈페이지에서 발췌. 1950년 10월 19일, 제 1 터키 여단 4,500명이 대한민국에 도착했다. 터키 여단은 대부분 터키 육군으로 구성됐으며, 총 3개 보병대대와 1개 야전보병대대, 1개 공병 중대, 1개 방공포대, 1개 수송중대, 1개 통신 소대, 1개 의무 중대, 기타 유지정비부대와 군악대, 예비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파병 터키군이 다양한 병종으로 구성되어 있던 것은 독립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제 1 터키 여단은 최초 주한 미 제 8군(EUSA)에 배속됐다. 1950년 11월, 터키 여단은 전초기지를 방어하면서 미 제 2보병사단의 우익을 맡았다. 이후 터키 여단은 미 제 25사단으로 배속되어 임무를 수행했다. 미군과 합동작전을 수행하면서 터키군은 뛰어난 총검술과..

[1951. 6. 1] 거제 수용소에 수용된 중공군 간호사

1952년 6월 1일, 거제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중국인 의대생으로만 밝혀진 여성의 모습. 스스로를 '최씨'라고만 이름을 밝혔으며, 민간인 복장 상태로 구금되어 있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사진에는 의대생인 동시에 의무병으로 활동했다고 기재되어 있었으므로 중국 인민의용군에서 활동하다가 포로가 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1980. 10. 18] 625전쟁 에이스의 짧았던 여정

마누엘 페르난데즈 (Manuel J. Fernandez, Jr.) 대위는 미 공군에서 20년 이상 복무한 전설적인 파일럿으로, 실전 참가 기록으로 수많은 훈장을 받았을 뿐 아니라 6.25 전쟁 중 최다 격추왕 3위에 오른 에이스였다. 6.25 전쟁 참전 전까지 그는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Las Vegas, NV)의 넬리스(Nellis) 공군기지의 비행 교관을 지내고 있었다. 페르난데즈 대위는 6.25 참전을 희망했으므로 교관 보직 중이었지만 참전부대로 옮겨달라고 수차례 요청했다. 당시 공군은 최고의 교관을 전쟁터로 보내는 것을 주저했다. 그가 차라리 넬리스에서 준수한 조종사들을 더 많이 양성해 전쟁터로 보내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요청이 계속 거부되자 페르난데즈 대위는 태업에 돌입했다..

[1952] 중공군 방한복을 걸친 미군 포로들

중공군에게 잡힌 미군 포로인 존 무어(John Moore/좌)와 윌리스 니콜스(Willis Nichols, Jr.)의 모습. 1952년 경에 촬영됐으나 장소는 북한 모처의 중공군 포로수용소일 것으로만 추정된다. 무어는 미 제 25보병사단 35연대 1대대 B중대 소속이었으며, 니콜스는 1기병사단 8기병연대 3대대 K중대원이었다. 두 사람 모두 소련군의 텔로그레이카 식 누빔 옷을 입고 있다. 이 옷은 양모와 솜을 혼합해 만든 옷으로, 동계전을 염두에 둔 중공군이 인민의용군 병력에게 지급했던 것이다. 그 위에 쓰고 있는 모자는 미군이 지급한 M51 야전 방한모이다. 미군 및 UN군 포로는 대부분 1953년 7월 휴전 후 실시된 빅 스위치(Big Switch) 작전으로 대부분 송환되어 돌아왔으나, 소수의 병사들..

[1950. 9] 북한 인민군의 리학구 총좌, UN군 투항

1950년 9월, 대구에서 미군에게 투항한 직후 촬영된 북한 인민군의 리학구(李學九, 1922~1963) 총좌. 그는 낙동강까지 진출한 인민군 제 13사단 참모장이었으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인민군의 선두부대와 후속부대 간 허리가 끊기자 마주 대치 중이던 미 제 1기병사단 8기병연대 1대대 B중대에 투항했다. 그는 6.25 전쟁 중 UN군의 포로가 된 인민군 최고위급 장교였으며,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가 휴전이 되고 나서야 포로교환이 이루어져 북한으로 돌아갔다. 그는 1952년 여름 거제도에서 일어난 공산 포로 폭동사건의 주동자이기도 했다. : 에서도 소개된 인물. 총좌는 현재 폐지된 계급으로, 국군 계급에 대응하자면 준장에 가깝다(소좌-중좌-대좌-총좌). 소속대인 인민군 13사단은 개전 초부터..

[1952. 2.] 2차대전 중 프랑스 외인부대를 이끈 백전의 노장, 지평리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다

자유프랑스에서 활약하며 프랑스 외인부대를 이끌었으며, 6.25 전쟁에서도 프랑스 대대를 이끌고 참전했던 랄프 몽끌라르(Ralph Monclar), 본명 라울 마그랭-베르느레(Raoul Charles Magrin-Vernerey, 1892~1964) 장군. 첫 사진은 미 10군단장이자 맥아더 원수의 참모장이던 알몬드 소장과 대화 중인 모습이며, 두 번째 사진은 프랑스 대대(미 제 2사단에 예속되어 있었음)원에게 훈장을 수여 중인 모습이다. : 가명을 쓴 이유는 나치 독일을 피해 자유프랑스에 합류했을 당시, 본명으로 활동하면 본국에 두고 간 가족이나 친인척에게 피해가 갈 가능성 때문이다. 그는 불과 15세의 나이로 프랑스 외인부대(Légion étrangère, 레종 에뜨랑제)에 지원했으나 나이가 너무 어려..

[1951. 9. 6] UN군, '피의 능선' 전투 승리

6.25 전쟁 중인 1951년 9월 6일, 미 제 2보병사단 소속 병사 두 명이 폐허가 된 통칭 "피의 능선(Bloody Ridge)" 정상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이 능선은 일명 "펀치볼(Punchbowl)"이라 불린 해안 분지 서쪽의 방산면 현리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 "피의 능선" 전투는 1951년 8월 18일부터 9월 5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현재의 강원도 양구군에서 벌어진 싸움이다. 1951년 중순,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면서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UN군은 다시 출발지인 군사분계선 인근까지 밀려 내려왔다. 이후 전열을 정비한 UN군이 역습을 하면서 일부 전선을 회복하긴 했으나, 전체적인 전황은 교착상태에 빠져버렸다. 이에 UN 진영과 공산진영은 개성에서 휴전회담에 들어갔다. 그..

[1952. 11. 6]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의 방한 준비 중인 미 제1 해병사단 병사들

1952년 11월 6일, 한국의 '제임스타운(Jamestown)' 방어선 주변 문선리 인근 벙커 위에 막 대통령에 당선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 Dwight Eisenhower, 1890~1969) 대통령 당선자를 환영하는 메세지를 붙이고 있는 자밀 파랏(Jamil Farhat) 병장과 에드워드 세인트 싱클레어(Edward St.Sinclair) 병장의 모습. 두 사람은 미 제 1 해병사단 소속이며, 10월 말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한국에 직접 방문한 후 전쟁을 조속히 끝내겠다는 메세지를 내보냈던 것에 대해 기대를 거는 모습이다. 아이젠하워 당선자는 실제로 같은 해 12월 2일에 한국을 방문해 전선을 직접 시찰했다. #625전쟁 #전쟁사 #역사사진

[1951] 6.25 전쟁 중 전초기지 전투 전투서열표

625 전쟁 후기(1951~1952)에 진행된 전초기지 전투(Battles of the Outposts)에 투입된 UN군 진영 참전부대 전투서열도. 대략 1951년 말~1952년 보직자 위주임. ■ 미(美) 제 10군단(US X Corps): 에드워드 알몬드(Edward Almond) 중장 - 한(韓) 제 6사단 (청성부대) - 임부택 준장 - 미 제 1해병사단 - O.P. 스미스(Smith) 해병소장 - 한 제 7보병사단 (칠성부대) - 김형일 준장 - 미 제 7보병사단 - 아더 트루도(Arthur Trudeau) 소장 - 미 제 25보병사단 - 새뮤얼 탱커슬리 윌리엄스(Samuel Tankersley Williams) 소장 - 콜롬비아 제 1~4 보병대대 - 하이메 폴라니아 뿌요(Jaime Polan..

[1953. 6] 패퇴하는 한국군을 수습한 명장, '오성장군' 김홍일 장군

6.25 전쟁 초반, 패퇴하던 국군을 다시 수습해낸 '오성장군' 김홍일(金弘壹, 1898~1980) 장군의 모습. 평안북도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중국에서 교육 받았으며, 잠시 교사로 재직한 적이 있으나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게되자 중화민국으로 망명한 후 중국 육군군관학교에 입교했다. 그는 국민혁명군에서 왕웅(王雄)이라는 이름을 쓰며 활약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이봉창(李奉昌, 1900~1932)과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사에게 폭탄을 만들어 준 이가 바로 김홍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625 때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 되어 적으로 상대한 최용건(崔庸健, 1900~1976)이 윈난(雲南) 군사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추천장을 써준 적이 있는데, 이는 최용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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