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오늘의 역사

사진과 함께 살펴보는 세계 속 이야기

2차세계대전 137

[1942. 12. 22] 막내동생의 전사소식을 들은 '히틀러의 최측근' 알베르트 슈페어

1942년 12월 22일, 문 앞에 지친 모습으로 앉아있는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 1905~1981). : 독일의 건축가로, 히틀러에게 중용받아 2차세계대전 내내 군수생산부 장관을 지냈다. 만하임의 중산층 집안 출신이며, 성적이 좋았지만 1923년에 발생한 초 인플레이션 사태로 집안 사정이 좋지 않아 카를스루에(Karlsruhe) 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이후 사정이 좀 나아지면서 뮌헨 기술대학교로 편입했다가 1925년에는 베를린 기술대학교로 옮겼으며, 이 곳에서 건축가 하인리히 테세나우(Heinrich Tessenow) 문하로 들어갔다. 그는 1927년 테세나우의 조교가 되면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슈페어는 1931년 1월 나치당에 가입 신청서를 냈으며, 1931년 3월 1일자로 수..

[1944. 12. 24] 총살 집행 중인 독일군 침투부대

미군 진영에 침투하던 독일군 첩자들이 총살당하기 직전의 모습. 이들은 1944년 12월 23일, '그리프(Grief)' 작전을 통해 미군 전투복을 입고 미군 진영 후방에 투입되었으며, 공공연하게 연합군 최고사령관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1890~1969) 원수를 암살할 것이라고 알렸다. 이들은 미군 전투복을 입고 교란행위를 한 혐의로 사형이 언도됐다. 이들을 처형한 근거는 정확하게 말하면 헤이그 협정 내용 중 '지상전에 관한 협약' 부분이다. 23조에 따르면 "이하의 내용은 특히 금지된다(중략)...휴전을 위한 백기, 혹은 적국의 국기나 군사 표식, 군복을 부적절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그리프 작전은 발지 대전투 중 독일군이 실행한 비밀 작전으로, 1944년 12..

[1941. 12. 13] 진주만 공습 중 불시착한 일본군 조종사가 일으킨 '니이하우 사건' 발생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이 벌어지던 중 일본군 함재기 조종사인 니시가이치 시게노리(西開地 重徳)가 하와이 제도 중 조금 떨어진 섬인 인구 136명의 니이하우 섬에 불시착했다. 아직 진주만 공습 사건을 모르던 현지 주민들은 그를 구조해 치료했으나, 곧 일본군의 기습에 대해 니이하우 주민들도 알게 되었고, 니시가이치 역시 공습 중 추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목숨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니시가이치는 곧 현지 주민 중 일본계 주민을 모아 섬을 장악하려 했으나, 하와이 원주민인 베네하카카 카나헬레가 니시가이치를 제압하려 했다. 니시가이치는 베네하카카를 향해 권총을 세 발이나 쐈지만 이 거구의 하와이 원주민은 쓰러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니시가이치를 잡아 들어 돌벽에 집어던졌다. 그리고 베네하카카의 아내..

[1953. 4. 23] 625에 참전한 패튼 장군의 아들

1953년 4월 23일, 강원도 인제군 인근에서 자신의 M46 패튼(Patton) 전차를 배경으로 선 조지 패튼 4세(George S. Patton IV, 1923~2004) 대위와 버나드 프레스키(Bernard Preskey) 중사의 모습. 이들은 당시 미 제 40보병사단 140 전차대대 A 중대의 중대장과 중대원이었다. 당시 140 전차대대 예하 2개 중대는 한국군 제 12보병사단을 지원하고 있었다. 이름으로 알 수 있듯, 패튼 대위는 2차세계대전의 전쟁영웅인 조지 패튼(George S. Patton, 1885~1945) 대장의 친아들이다. 당시 그는 한국에 부임한지 2개월 차였으며, 휴전선 경계를 놓고 UN 진영과 공산진영이 마지막 전력을 쏟아넣는 치열한 시기에 한국에서 싸웠다. 그는 8월 휴전 무..

[1950] 처음 콜라를 마신 파리 시민의 반응

평생 처음 콜라를 마시며 리액션을 보여준 어느 파리 시민의 모습. 1950년대에 촬영된 사진이다. 코카콜라는 1950년부터 프랑스 시장에 진출해 소프트드링크 분야를 석권하고자 했다. 당시 코카콜라는 "신선하게 마셔요(Drink Fresh)"를 슬로건으로 밀었으며, 광고로 포장된 미니밴이 파리시내를 누비면서 세일즈맨들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홍보용 콜라를 돌렸다. 코카콜라는 이 활동을 '차가운 혁명(La revolution du froid)'이라 불렀다. 코카콜라는 1919년부터 이미 프랑스에 진출했으나 해외 운송 과정에서 제품 변질이 일어나 집단 식중독이 일어나는 등 사고가 많았기에 적극적으로 판매하지 않았다. 코카콜라가 해외 시장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것은 1945년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부터 였는데,..

현대사 2023.12.11

[1915] 3차 십자군 기사와 악수하는 호주 육군 모병 포스터

오스트레일리아의 1차세계대전 참전 독려 포스터. 1189년부터 1192년까지 진행된 3차 십자군 원정대의 영국군 기사와 악수하는 오스트레일리아 병사 모습을 그려놓았다. 3차 십자군 원정은 '사자왕' 리처드 1세(Richard I, 1157~1199)가 참가해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1193)과 일전을 치렀던 십자군 원정이다. : 오스트레일리아 육군은 1차세계대전 발발 후 연합군에 참여하면서 뉴질랜드 군과 병력을 통합한 후 지중해 원정군을 편성했다. 1914년 이집트에 도착한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병사들은 앤잭(ANZAC: Australia-New Zealand Army Corps)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최초에는 이들 부대를 단순히 오스트레일리아 연합군 혹은 오스트랄라시아 (Australasia)..

[1945. 11. 20] 뉘른베르크 전범재판 시작

1945년 11월 20일,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이 시작됐다. 뉘른베르크 재판은 우선 24명의 고위급 나치 관리를 대상으로 재판을 시작했으며, 전후 전쟁범죄 조사가 진행되면서 대상자가 늘었다. 연합군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포로가 된 나치 관리들의 처우를 고민하게 됐으나,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나왔다. 스탈린은 사로잡은 나치 장교와 정부관리 대부분을 대규모 처형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영국은 이들 전부에 대한 일괄적 처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후에는 미국, 프랑스, 영국, 소련 모두 포로가 된 나치 관리에 대해 재판을 벌인 후 '최악의 인물'들에 대해서만 처형하는데 동의했다. 재판은 국제 군사법원(IMT: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에서 처리하기로 했으며, 이 법원은..

[1945. 5. 8] 유럽전선 종전을 축하 중인 '밴드오브브라더스'의 주역들

1945년 5월 8일, 미 제 101 공정사단 506 낙하산연대 2대대 예하 '이지(Easy)' 중대원들이 독일이 항복한 날인 V-E 데이(Victory over Europe Day)에 알프스 바바리아 지방 베르히스가텐(Berchtesgaden)에서 축하 중인 모습. 이들은 5월 5일에 이 곳에 도착했다. 사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리처드 D. 윈터스(Richard D. Winters, 1918~2011) 소령, 루이스 닉슨(Lewis Nixon III, 1918~1995) 대위, 해리 웰시(Harry F. Welsh, 1918~1995) 중위, 토마스 피콕(Thomas A. Peacock, 1920~1948) 중위, 로이드 콕스(Lloyd J. Cox, ?~?) 대위. 디지털 채색 사진.

[1943. 10. 24] 일본군에게 참수당하는 호주 육군 병장

1943년 10월 24일, 뉴기니의 아이타페에서 일본군 장교인 치카오 야스노가 2차세계대전 중 연합군이 오세아니아 일대에서 운용한 연합 정찰부대인 'M 특수부대(M Special Unit)' 소속 오스트레일리아 육군 하사인 레너드 시플릿(Leonard G. Siffleet, 1916~1943)을 참수하기 직전에 촬영된 사진. 라이프(LIFE) 지에 수록됐던 사진이다. 이 사진은 그와 용모가 비슷하고 비슷한 최후를 맞이한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중위인 빌 뉴튼(Bill Newton)과 자주 혼동된다.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시플릿은 네덜란드 압제에 불만을 갖다가 일본에 합세한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고 사로잡혔으며, 이 사진은 문제의 치카오 야스노가 직접 부대 소속 일병에게 촬영시켰다. 이후 1944년 4월, 뉴 홀..

[1948] 네 남매를 '팔기 위해' 내놓은 시카고의 어느 가족

1948년, 미국 시카고에서 촬영된 유명한 사진. 네 남매를 계단에 앉힌 엄마가 고개를 돌리고 있고, 그 옆의 거대한 팻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네 명의 아이들을 팝니다. 자세한 건 안에서 문의해 주세요." 실제로 이 사진은 진짜였고, 아이들은 정말 "팔려고" 내놓은 것이었다. 아버지인 40세의 레이 찰리푹스 (RayChalifoux)와 엄마인 24세의 루실(Lucille)은 둘 다 직장이 없었으며,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들은 집세가 밀려 집에서도 쫓겨날 처지에 있었다. 물론 실제로 이 "네 명의 아이들을 팝니다"라는 팻말은 최소 당시에는 진심이 아니라 '우리를 도와달라'는 외침에 가까웠다. 이 파격적인(!) 팻말과 아이들 사진은 이들의 사정과 함께 곧 지역 신문에 실렸고, 곧 전국 언론사..

현대사 202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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