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오늘의 역사

사진과 함께 살펴보는 세계 속 이야기

전쟁사 202

[1944. 8. 12] 연합군을 막기 위해 파리 시내에 긴급 전개된 독일군 전차

독일 국방군 제 503 중전차대대(Schwere Panzer-Abteilung 503) 소속 판처 IV "쾨니히스티거" 전차가 1944년 8월 12일 마예르콩(Mailly-le-Camp)에서 열차로 수송되어 온 후 파리 동(東)역에서 하차해 파리로 진입한 모습. 이들 전차는 오베빌리에 가(Rue d'Aubervilliers)에서 빌렛 대로(Boulevard de a Villette)로 꺾고 있으며, 파리로 진격해오는 연합군을 막기 위해 멍뜨라졸리(Montes-la-Jolie) 앞으로 향하고 있다. 뒤쪽 전차에는 331, 앞쪽 전차에는 332라는 번호가 새겨져 있는데, 두 전차 중 331호차는 8월 29일 아베른-개동쿠르(Avernes-Gadancourt)에서 격파됐다. 332호차 역시 비슷한 날짜에 연합..

[1941.10] 영국 해외정보기관 MI6의 해외 스테이션 결산내역

1941년 4/4분기 영국 해외정보부 MI6(SIS: Special Intelligence Service) 해외 스테이션 결산자료. 동남아지역에서 지출이라고는 홍콩 스테이션의 최소인원 급료만 책정된 점이 특기할만 하다(그나마 홍콩 스테이션의 정보수집 자체도 신뢰도가 형편없었다). 1941년, 당시 영국은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부터 태국, 영령 버마와 말라야(말레이시아) 일대에서 진행 중인 국내 정보작전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다. MI6는 이 지역에 대한 정보를 지역 내에서 활동하는 영국인 사업가와 프랑스인, 네덜란드인, 미국인들로부터 알음알음 들어 수집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 때문에 1941년 12월 8일부터 일본이 동남아 일대에 대해 진공을 개시한 것은 연합군의 맹점을 찌른 것과 유사했다.

[1937] 독일의 도움으로 양성된 국민혁명군 제 88 사단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병사들이 도열하고 있는 모습. 국민혁명군의 정예는 1926년에 체결된 중-독 군사협력조약에 의해 1941년까지 독일식으로 훈련받고 독일제 장비로 무장했다. 이들 사단은 국공내전은 물론, 중일전쟁에도 투입되어 국민혁명군의 핵심 전력으로 활약했다. :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제 87 및 88사단은 장제스(蒋介石, 1887~1975) 특급상장(特級上將)이 보유하고 있던 최정예 부대였다. 이 두 부대는 장제스가 1930년 초, 독일 군사고문을 받기로 하면서 양성이 시작됐다. 장제스는 초대 독일 군사고문으로 바이마르(Weimar) 공화국 시절 병무총감을 지낸 한스 폰 젝트(Hans von Seeckt, 1866~1936) 중장을 받았으며, 젝트 장군은 부대 양성과 훈련 뿐 아니라 국공내전에서 공산..

[1952] 진지 통로에 서 있는 영국군 병사와 한국군 증원단 병사

625전쟁 중 진지 통로 앞에서 '고개를 계속 숙이시오'라는 팻말을 들고 서 있는 UN군 병사의 모습. 1952년 혹은 53년에 촬영된 사진으로, 해당 병사는 제 1 영연방 사단 예하 28 영연방여단 더럼(Durham) 경보병연대 제 1대대 소속이다. 배경에 같이 찍힌 병사는 한국군에서 증원해 준 영연방 한국군 증원단(KATCOM: Koreans Attached to the Commonwealth Division) 소속 병사로 보인다.

[1953. 7. 27] 정전협정 체결로 625 전쟁이 기나긴 휴전에 들어가다

다소 독특한 6.25 전쟁 휴전 직후의 사진으로, 1953년 8월 10일, 휴전이 성사된 지 두 주 뒤 미 제 8군(EUSA: Eighth US Army) 병사들과 북한군 병사들이 대화하면서 라이터를 빌려주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 자체에 대해서는 더 자세한 설명이 붙어있지 않다. :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개전으로부터 3년 1개월 2일 뒤인 1953년 7월 27일에 성사됐다. 휴전에 관한 정식 문서명은 이며, 이 문서는 UN측 대표인 윌리엄 해리슨(William K. Harrison, Jr., 1895~1987) 중장과 마크 클라크(Mark W. Clark, 1896~1984) 대장, 북한측 대표인 김일성(金日成, 1912~1994)과 남일(南日, 1915~1976) 대장, 중공측 대표인 ..

[1944. 5. 22] 안치오 전투 중 부상병을 이송 중인 독일군 포로들

1944년 1월~6월까지 이탈리아 안치오(Anzio) 에서 벌어진 '안치오' 전투 중 촬영된 사진. 1944년 5월 22일, 안치오에서 지뢰를 밟고 한쪽 다리가 날아간 영국군 병사를 연합군 포로가 된 두 독일군 공정부대원들이 부축하고 있는 모습이다. 2처 세계대전 중 지뢰에 의한 부상은 최근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자주 등장한 급조폭발물(IED: Improvised Explosive Device)에 의한 피해와 다를 바 없었다. 아울러 포로로 사로잡은 독일군 공정대원을 부상자 이송에 투입하는 경우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 전투 후에는 일손이 부족한 경우가 많아 포로를 부상자 이송 등의 노역에 투입하는 것 자체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안치오 전투는 2차세계대전 중 이탈리아 전역에서 벌어진 전투 중 하나로, ..

[1950. 10. 19] 터키 제 1 여단, 대한민국 도착 후 UN군에 합류

*어제자 UN사 홈페이지에서 발췌. 1950년 10월 19일, 제 1 터키 여단 4,500명이 대한민국에 도착했다. 터키 여단은 대부분 터키 육군으로 구성됐으며, 총 3개 보병대대와 1개 야전보병대대, 1개 공병 중대, 1개 방공포대, 1개 수송중대, 1개 통신 소대, 1개 의무 중대, 기타 유지정비부대와 군악대, 예비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파병 터키군이 다양한 병종으로 구성되어 있던 것은 독립적인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제 1 터키 여단은 최초 주한 미 제 8군(EUSA)에 배속됐다. 1950년 11월, 터키 여단은 전초기지를 방어하면서 미 제 2보병사단의 우익을 맡았다. 이후 터키 여단은 미 제 25사단으로 배속되어 임무를 수행했다. 미군과 합동작전을 수행하면서 터키군은 뛰어난 총검술과..

[1944.7.20] '발키리 작전', 히틀러 암살미수사건 발생

1944년 7월 20일,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Claus von Stauffenberg) 대령을 비롯한 이들이 동프로이센 라스텐부르크(Rastenburg)의 히틀러 야전지휘소인 '늑대굴'에 폭탄을 설치해 히틀러 암살을 모의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일명 "발키리 작전(Operation Valkyrie)"이라 명명했던 이 암살 계획은 원래 암살계획 전체의 일부에 불과한 작전을 말하는 것이었으나, 후대에는 암살 미수 사건 전체를 칭하는 명칭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히틀러 암살 계획에는 히틀러에게 실망한 장교들 외에도 전통적인 우익 보수 성향 정치가, 고위 경찰, 그리고 외교관들까지 가담했다. 이들은 히틀러가 최대한 끔찍하게 살해당해야 일반 국민들이 반(反) 나치 폭동을 일으킬 것이라 예상했다. 7월 20일..

[1951. 6. 1] 거제 수용소에 수용된 중공군 간호사

1952년 6월 1일, 거제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중국인 의대생으로만 밝혀진 여성의 모습. 스스로를 '최씨'라고만 이름을 밝혔으며, 민간인 복장 상태로 구금되어 있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사진에는 의대생인 동시에 의무병으로 활동했다고 기재되어 있었으므로 중국 인민의용군에서 활동하다가 포로가 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1944] 아이스크림 배식 줄을 새치기한 미 해군 장교들의 최후

오늘은 미국의 '아이스크림의 날'이다. 2차세계대전 중에 장병 사기를 위해 미 해군이 일부러 아이스크림 공급에 신경썼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있다. 그런 어느 날, 한 미 해군의 함정 내에서 아이스크림 공급이 시작되자 수병들이 달려와 줄을 섰다. 그때 두 명의 장교가 오더니 계급빨을 내세우며 앞으로 새치기를 했다. 그러자 뒤에서 어마어마한 항의가 들어왔고, 이에 두 장교는 다시 계급을 강조하려고 뒤로 돌았는데 - 순간 이들의 눈에는 수병들과 함께 줄 서있다가 대노한 표정으로 항의하고 있는 함대사령관인 윌리엄 할시(William F. Halsey, 1882~1959) 중장의 모습이 보였다. 이에 두 사람은 아무 말도 못하고 줄 맨 끝으로 가 섰다고 한다. : 덧붙이자면 2차세계대전 종전 후 원수까지 진급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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