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오늘의 역사

사진과 함께 살펴보는 세계 속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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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205

[1945. 2. 13] 격파된 독일군 돌격포 뒤에 은폐 중인 자유폴란드 병사들

영국군에 배속된 제 2 폴란드 군단 3 '카르파티아(Carpathian)' 라이플 사단 2여단 5대대 1중대 1소대원들이 격파된 독일군 돌격포 뒤에 은폐한 상태로 2인치 박격포를 장전 중인 모습. 뒤에는 통신병이 웅크린 상태로 통신 연결을 시도 중인 모습이 보인다. 이 사진은 1945년 2월 13일, 파엔차(Faenza)에서 촬영됐다. 이들은 정찰부대로, 세니오(Senio) 강 남쪽 언덕으로 정찰을 하던 중 적과 조우했다. 사진 속에 격파된 돌격포는 이탈리아제 세모벤테(Semovente) 75/18의 파생형으로, 정식 명칭은 세모벤테 M42M 75/34이다. 이 차량은 기본적으로 세모벤테 75/18 M41에 75mm L34 브레다(Breda) 포를 장착한 형상으로, 대전차 공격 능력을 향상 시킨 차량이다..

[1941. 9] 동부전선 이동을 준비하는 독일군 스페인 자원병 사단

1941년 9월, 동부전선 전개를 준비 중인 스페인 출신 구성부대인 '청색부대'원들의 모습. : 스페인어 명칭 때문에 '아줄(Azul)' 사단으로도 알려져 있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스페인 출신의 나치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구성한 부대이며, 주로 동부전선에 전개됐다. 사단 정식 명칭은 독일국방군 제 250 보병사단이었으며, 파견한 스페인 측에서는 '스페인 육군 자원 사단'으로 지정하고 있었다.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 장군은 스페인 내전(1936~1939)에서 국민파를 이끌고 승리하면서 권력을 장악한 상태였다. 정권 장악 후 프랑코는 연합국-추축국 어디에도 가담하지 않은 '중립'을 표방했으나,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 독일로부터 전격적인 지원을 ..

[1929. 6. 12] 홀로코스트 희생자인 '안네 프랑크'와 그녀의 일기

1929년 6월 12일은 독일이 네덜란드에서 자행한 홀로코스트(Holocaust) 피해자인 안네 프랑크(Anne Frank, 1929~1945)의 생일이었다. 안네 프랑크는 나치 당이 독일에서 떠오르기 시작하던 시점에 독일의 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은 히틀러가 독일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반 유대계 정책을 하나 둘 씩 표방하기 시작하자 1934년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곧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하면서 이들 가족 역시 네덜란드 안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1941년, 안네 프랑크의 가족은 국적을 말소 당하고 무국적자 신분이 되었다. 1942년부터 유대인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이들 가족은 이사를 가는 척 한 뒤 안네의 아버지인 오토 프랑크(Otto Frank, 1889..

[1980. 10. 18] 625전쟁 에이스의 짧았던 여정

마누엘 페르난데즈 (Manuel J. Fernandez, Jr.) 대위는 미 공군에서 20년 이상 복무한 전설적인 파일럿으로, 실전 참가 기록으로 수많은 훈장을 받았을 뿐 아니라 6.25 전쟁 중 최다 격추왕 3위에 오른 에이스였다. 6.25 전쟁 참전 전까지 그는 네바다 주 라스베이거스(Las Vegas, NV)의 넬리스(Nellis) 공군기지의 비행 교관을 지내고 있었다. 페르난데즈 대위는 6.25 참전을 희망했으므로 교관 보직 중이었지만 참전부대로 옮겨달라고 수차례 요청했다. 당시 공군은 최고의 교관을 전쟁터로 보내는 것을 주저했다. 그가 차라리 넬리스에서 준수한 조종사들을 더 많이 양성해 전쟁터로 보내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요청이 계속 거부되자 페르난데즈 대위는 태업에 돌입했다..

[1942] '간지 폭발(!)'의 코트를 걸친 독일공군 장교

독일공군 제 77 급강하 폭격 비행단(StG77) 지휘관인 클레멘스 그라프 폰 쇤본-비젠타이트(Clemens Graf von Schönborn-Wiesentheid, 1905~1944) 백작(소령)의 모습. 1942년 러시아 남부 어디에선가 촬영된 사진이다. : 2차 세계대전 중 주로 추축국의 유고슬라비아 전역에 참가한 인물. 독일공군(루프트바페)에서 활약하며 종전까지 대령을 달았다. 1934년 독일 국방군(육군)으로 입대했으나 1년 뒤 독일 공군으로 전군했으며, 1936년 3월 전임자이던 테오 오스테르캄프(Theo Osterkamp, 1892~1975) 소령(최종 계급은 소장)이 보직을 옮기자 제 132 "리히트호펜(Richthofen)" 전투비행단(JG 132) 4 전투비행대대장에 보직됐다. 1937..

[1942. 6. 1] 요크타운 항모, 미드웨이로 이동하며 긴급 수리 실시

1942년 6월 1일, 미 해군 항모 요크타운 함(USS Yorktown, CV-5)이 진주만을 출항해 미드웨이로 출항했다. 당시 요크타운은 산호해(Coral Sea) 해전 중 심각하게 파손을 입었으므로 승선인원 1,400명이 48시간동안 조를 짜 돌아가면서 긴급 수리를 실시했다. 일본은 산호해에서 요크타운에게 치명타를 입혔으므로 분명 그 자리에서 가라앉았거나, 최소 중(重)수리를 실시하느라 미드웨이에 투입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48시간동안 수리를 마친 요크타운은 미드웨이에 등장했을 뿐 아니라, 이날 미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기까지 했다.

[1940. 12. 31] 제빵중대로부터 받은 빵을 먹는 독일군 병사들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이 운용하던 제빵중대(Backereikompanie)로부터 빵을 배분 받은 독일군 병사의 모습. 1940년 12월 31일 동부전선에서 촬영된 사진으로, 병사들이 배분 받은 빵을 쪼개 먹고 있는 모습이다. 빵은 아침 및 저녁 식사에서 칼로리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독일군 식단에서 중요했다. 따라서 1개 사단이 매일 같이 충분한 "빵"을 공급하는 일은 사실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이런 이유로 독일군은 1개 사단 예하에 각 3개 '제빵' 중대를 설치했으며, 이들 부대에는 2개의 오토바이와 1개 마차가 배치됐다. 1개 중대는 2개 제빵 분대로 구성됐으며, 이들 중대에는 모두 유지 정비 소대가 하나씩 붙어있어 필요한 집기 류를 정비했다. 이들 중대와 분대의 인원 수는 사단 형편에 따라 달..

[1947] 소련이 처형한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어쩌면 20세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이 중 하나지만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 비톨트 필레츠키(Wiltold Pilecki, 1901~1948)는 폴란드 육군 출신의 정보장교로, 아우슈비츠(Auschwitz) 수용소에서 자행된 나치 독일의 대규모 학살 행위를 파헤친 인물이다. 필레츠키는 이미 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폴란드로 쳐들어온 소련군, 리투아니아군, 독일군과 싸웠다. 그는 기술이 좋은데다 계산이 정확한 인물이었으므로 정보를 수집한 후 이를 토대로 적에게 확실한 사보타주를 가했다. 그는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독일군의 유대인 대학살, 통칭 홀로코스트(Holocaust) 정황을 처음으로 포착한 인물이다. 필레츠키는 폴란드가 독일-소련에 나뉘어 점령당하자 지하 저항세력인 폴란..

[1942. 2. 19] 美 대통령, 행정명령 9066호 서명...미 서부해안 재미 일본인 격리 개시

진주만 공습이 벌어진 직후, 미국 서해안 지역에 살고 있던 재미 일본인들이 적국이 된 일본에 협력하여 '제5열' 노릇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자 루즈벨트 행정부는 대통령 행정명령 9066호로 미 서부해안에 거주 중이던 약 110,000명의 재미 일본인들을 격리하도록 조치했다. 이들 중에는 미국 시민권자가 71,000명이 있었고, 상당 수 미국에서 태어나 자라왔기 때문에 "미국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었음에도 이들의 소명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 이 재미 일본인 격리 정책과 관련해 『이코노믹 리뷰』지에 실렸던 내용: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던 무렵 나치 독일은 국내와 점령지에서 유대인 혈통을 가진 이들을 따로 분류해 ‘게토’ 지구에 격리했으며 전쟁 중후반기에는 강제 수용소에서 최대 추산 약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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