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오늘의 역사

사진과 함께 살펴보는 세계 속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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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세계대전 141

[1947. 2. 24] 동족 유대인을 팔아넘긴 안스 판 데이크의 재판

1947년 암스테르담에서 나치에 협력한 혐의로 재판 중인 안스 판 데이크(Ans van Dijk, 1905~1948)의 모습. 2차대전 중 그녀는 유대인들을 꾀어낸 뒤 게슈타포에게 유인해주고, 그 댓가로 돈을 받았다. 그녀는 네덜란드 레지스탕스인 척 위장했으며, 유대인에게 접근해 은닉처를 소개해주는 척 하면서 위조서류로 신뢰를 샀다. 이런 식으로 그녀는 145명을 함정으로 유인했으며, 그 중에는 그녀의 남동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중 85명은 결국 유대인수용소 내 가스실에서 살해당했다. 추정에는 실제 그녀가 죽음으로 이끈 사람은 최대 700명까지 달할 것으로도 보고 있으며, 일부 자료를 바탕으로 추정한 바에 따르면 안네 프랑크(Anna Frank, 1929~1945) 가족 역시 그녀가 밀고했을 가능성이..

[1943. 11. 5] 남 대서양에서 맞은 U-848함의 최후

독일군 잠수함 U-848이 남 대서양에서 공격받고 있는 모습. 이 잠수함은 1943년 11월 5일, 브라질 해안에서 49일간 작전을 실시하던 중 미 해군의 VB-107 항공기에게 발견됐다. 그리고 곧이어 날아온 3대의 PB4Y-1 리버레이터(Liberator)가 투하한 폭뢰에 당해 승조원 63명이 모두 전사했다. 1943년 11월 5일, 남 대서양 아순시온(Ascension) 섬에서 이륙한 미 해군 항공기가 초계비행 중 완전히 수상으로 나와 항해 중인 U-보트 한 척을 10.09S, 18.00W 에서 발견했으며, 11:25분부터 공격을 시작했다. 그 시점부터 잠수함이 결국 침몰한 19:00시까지 미 해군 항공기 4대와 육군항공대 항공기 2대가 번갈아가며 공격해 33개의 폭뢰와 12개의 폭탄을 U-보트 위..

[1942. 2. 14] 칸톤 섬 공습 당시 맥케인 제독의 비화(秘話)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군이 연합군의 칸톤(Canton) 섬을 공습하던 당시, 태평양사령관이던 체스터 니미츠(Chester W. Nimitz, 1885~1966) 제독은 존 맥케인(John McCain, sr., 1884~1945) 제독이 방공호에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니미츠 제독의 부관이 맥케인 제독의 집무실로 미친듯 달려가 방문을 열어보니, 그는 내실 화장실 안에서 변기에 틀니를 빠뜨려 그걸 꺼내려고 계속 변기를 휘젓고 있었다. 사건이 지나간 후 맥케인은 이 사실을 비밀로 묻어두려 했으나, 이후 그가 반복적으로 틀니를 살균 소독해달라는 말을 열 다섯 번이나 하면서 모두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지게 되었고, 틀니 사건도 자연스럽게 알려지게 되고 말았다. : 공화당 대선 후보이기도 했던 전 애리조나..

[1940] 독일의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의 마지막 사진

1940년, 네덜란드 도른(Doorn)의 자택에서 애견과 함께 촬영된 81세의 전(前) 독일 황제 빌헬름 2세(Wilhelm II, 1859~1941)의 모습. 1918년 11월 9일, 빌헬름 2세는 1888년 즉위 후 내내 지위를 지켜왔던 독일 황제("카이저") 자리를 내놓고 퇴위했다. 1918년 11월 3일, 독일 킬(Kiel)에서 발생한 제국 해군의 수병 반란으로 야기된 독일 혁명이 성공하면서 독일 제국이 무너지고 바이마르 공화국이 수립됐다. 독일 대공자이자 수상이던 막시밀리안 폰 바덴(Max von Baden, 1867~1929)은 11월 9일 정오를 기해 황제의 동의없이 빌헬름 2세의 퇴위를 발표했으며, 그 역시 곧이어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바덴은 후임으로 사회 민주당 당수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1945. 3. 21] 독일의 제트 에이스, 하인리히 에를러 소령의 최후

주요 전쟁터인 유럽의 한참 북쪽인 핀란드와 노르웨이에서 주로 활동한 독일 공군 제 5 전투비행단(JG5) "아이스미어(Eismeer)"는 상대적으로 전투빈도가 떨어지는 전장이 주 작전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부전선 최고 격추기록을 수립한 에이스를 다수 배출했다. 그 중에서 가장 월등했던 인물은 하인리히 에를러(Heinrich Ehler, 1917~1945) 중위(최종계급은 소령)로, 그는 전쟁 기간 중 애기(愛機)인 Me 262를 타고 총 208회의 격추를 기록했으며 그 중 10회의 격추는 서부전선, 나머지는 모두 동부전선에서 수립했다. 에를러의 최후는 비극적이었다. 그의 마지막 이야기는 1944년 11월 12일, 제 5 전투비행단장이 영국군 폭격기가 다가오고 있다고 대원들에게 알리면서 시작됐다. 당시..

[1942. 12.] 스탈린그라드에서 퇴각하는 이탈리아군

1942년 12월, 소련 스탈린그라드 인근에서 퇴각 중인 이탈리아군 병사들 뒤의 눈 덮인 들판에 얌전히 앉아있는 개 한마리의 모습. : 스탈린그라드 전투에는 막시밀리안 바이흐스(Maximilian Weichs, 1881~1954) 원수가 지휘하는 "B 집단군"이 주축으로 투입됐으나, 휘하에는 '독일 동맹군'인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군이 참전했다. 이탈리아는 지오반니 메세(Giovanni Messe, 1883~1968) 대장이 지휘하는 제 8군이 투입됐고, 루마니아는 페트레 두미트레스쿠(Petre Dumitrescu, 1882~1950) 대장의 3군과 콘스탄틴 콘스탄티네스쿠-클랍스(Constantin Constanitinescu-Claps, 1884~1961) 중장의 4군이 전개됐다. 한편 이들과 별..

2차대전의 '아기 항모(Baby Flattop)', 호위항모(Escort Carrier)

미 해군 선체식별기호 'CVE'가 붙은 호위항모의 모습. 이들은 미 해군에서 '지프차 항모', '아기항모(baby flattop)' 등으로 불렸다. 보통 호위항모는 선체 길이가 일반 항모의 절반이었으며, 만재배수량이 대형 함대 항모에 비해 1/3에 불과했다. 이들 항모는 느렸고, 무장도 가벼웠으며, 장갑도 얇았고 탑재 항공기 수도 적었다. 호위항모는 보통 민간 상선 선체를 기반으로 건조했으므로 건조비가 싸고 건조기간도 짧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들은 함대에 항모가 모자라 추가로 건조하는 동안 빠르게 찍어내어 임시로 운용하기 적합하다는 것이 거의 유일무이한 장점이었다. 호위항모는 장갑이 얇아 적 공격에 취약했고, 한 척이 침몰할 경우 수많은 승선인원의 목숨도 같이 희생됐다. 호위항모는 속도도 쳐져 항공모함,..

무기체계 2022.11.29

[1942. 9. 27] 미 해안수비대 유일의 명예훈장 수훈자, 더글러스 먼로 하사

미 해안수비대(USCG: United States Coast Guard) 중 유일한 명예대훈장 수훈자인 더글러스 앨버트 먼로(Douglas Albert Munro, 1919~1942) 하사(Signalman First Class)의 모습. 그는 1942년 9월, 2차 마타니카우 전투에서 미 해병대 진지가 일본군에게 압도당하자 이들 해병을 탈출시키기 위해 투입됐다. 그는 히긴스 보트(Higgins Boat)를 조종해 해안까지 도달했으나, 해병대원들이 가득 탄 상륙정이 공격받게 되자 자신의 보트를 들이대 방패로 삼아 대신 기관총 세례를 받고 전사했다. 향년 22세. : 미국계 부친, 영국계 모친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캐나다에서 출생했다. 하지만 가족은 곧 미국으로 이주해 워싱턴 주에서 자랐으며, 중부 워싱턴..

[1947. 7. 27] 『밴드오브브라더스』의 헨리 존스 소위

HBO 드라마 에서 영화배우 톰 행크스(Tom Hanks, 1956~)의 아들인 콜린 행크스(Colin Hanks, 1977~)가 역할을 맡아 열연했던 헨리 "행크" 존스(Henry 'Hank' Jones) 소위의 극 중 모습과 실제 모습. 헨리 존스는 1924년 4월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뉴욕과 펜실바니아를 오가면서 자랐다. 그는 군인인 부친을 보며 일찍부터 자신도 커서 군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고, 그렇게 1941년 웨스트포인트(West Point) 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44년 6월 6일에 졸업하면서 소위로 임관한 존스는 조지아 주 포트 베닝의 보병학교에서 보수교육을 받았으며, 곧 공정학교에 입교했다. 그는 공수기장을 받은 후 노스 캐롤라이나 주 캠프 맥칼(Camp Mackall)의 제 1..

[1937. 8. 28] 상하이 전투 - '피의 토요일'

'피의 토요일'이 된 1937년 8월 28일, 제2차 중일전쟁 중 벌어진 상하이 전투 초에 촬영된 상하이 시내의 모습. 일본군이 상륙을 위해 사전 폭격을 실시한 뒤 불과 몇 분 후의 광경이다. 이 장소는 상하이 남부역으로, 순식간에 폐허가 된 역사에서 울고 있는 아기의 모습이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강렬한 메세지로 담겼다. 이 사진은 당시 일본이 중국에서 자행하고 있던 전쟁 참화를 알리는 일종의 문화적 아이콘이 됐으며, 불과 한 달 만에 전세계 약 1억 3,600만 명의 인구에게 퍼져나갔다. 이후 사진 속 아기는 곧 나타난 아버지가 데리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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