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오늘의 역사

사진과 함께 살펴보는 세계 속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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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205

[1917. 12. 12] 반세기 뒤에야 밝혀진 모단(Modane) 열차 충돌 사고

1917년 12월 12일, 모단(Modane) 열차 충돌 사건이 발생해 프랑스 군 병사 약 700명이 사망했다. 1차 세계대전 중 열차는 병력 및 장비 수송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개전 후 상당 수의 국가가 수송수단과 물자 부족 현상을 겪었으며, 이 때문에 노후한 열차까지 다시 투입했다. 열차는 대부분 동력에 비해 물자를 과적으로 싣고 달렸으며, 이 때문에 종종 문제가 발생하기 일쑤였다. 1917년 12월 12일, 카포레토(Caporetto) 전투에서 이탈리아 군이 패퇴하자 프랑스 제 12 집단군 소속 병사 약 1,000명이 이탈리아 전선으로 증원을 갔다가 프랑스로 다시 귀환하기 위해 집결했다. 이들 병사는 우선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프랑스 리옹까지 두 대의 기차로 이동시키기로 했으나, 실제 가용한..

[1936. 8. 24] 맥아더 원수의 '트레이드마크', 필리핀 원수 군모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원수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인 원수 모(帽). 맥아더는 미 육군 원수(General of the Army, GA)이자 필리핀 육군 원수(Field Marshal) 계급을 갖고 있었으며, 이미 1930년대에 육군참모총장을 한 차례 지낸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2차 세계대전 때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던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필리핀 작전 중의 공로로 명예대훈장을 받았으며, 마찬가지로 미-서 전쟁 중 명예대훈장을 받은 부친(아더 맥아더[Arthur MacArthur, Jr., 1845~1912] 중장)과 함께 "2대가 명예대훈장을 받은" 단 두 사례 중 하나이다. 그는 미 육군에서 오성계급에 도달한 다섯 명 중 하나이..

[1917. 12. 11] 美, 캠프 로건 흑인병사 반란사건 주모자 13명 교수형 집행

1917년 12월 11일, 13명의 흑인 미국인이 캠프 로건(Camp Logan) 반란 사건 후 교수형을 당했다. 이 사건은 1917년 휴스턴 반란사건으로 불린다. 1917년 4월, 미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뒤 미 전역에 신규 군 기지를 여러 곳에 건립했다. 캠프 로건은 텍사스 중 휴스턴에 건설한 신규 기지 중 한 곳이었다. 그러던 중인 1917년 7월 27일, 미 제 24보병연대 3대대가 캠프 로건 건설 현장에 대한 관리감독 및 방호임무를 부여 받았다. 해당 연대는 특별히 "전원 흑인"으로 창설한 부대였다. 이는 인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린 조치가 아니라, 당시 흑인과 백인은 분리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전원 흑인으로 부대원을 구성한 것이었다. 명령 직후 이 흑인 부대는 휴스턴에 도착했고, 당연히 ..

[잡학상식사전] '환타(Fanta)'의 탄생 이야기

1923년, 코카콜라(Coca-Cola) 주식회사가 신임 사장으로 로버트 우드러프(Robert W. Woodruff, 1889~1985)를 선임했다. 코카콜라 브랜드를 미국 내 뿐 아니라 전세계로 확장코자 했던 그는 다양한 시도를 하며 사세를 확장했다. 하지만 전세계 시장으로 사세를 넓혀본다는 코카콜라의 '수출' 시도는 처음에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예를 들어 프랑스 코카콜라 생산시설의 경우에는 병입 과정에서 위생 관리를 잘못해 음료를 마신 사람들이 식중독에 걸렸던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카콜라의 수출실적은 '매우 별볼일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신임 우드러프 사장은 본격적으로 수출에 뛰어들면서 '해외사업부(Foreign Department)'를 설치했다. 훗날 '코카콜라 수출 주식회사..

[1941. 12. 8] 일본, 필리핀 침공 개시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당시 미국령이지만 자치권을 부여 받은 상태였던 필리핀으로 침공했다. 일본 입장에서 필리핀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우선 이 곳은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에 가까운 전초기지였으므로 제거할 필요가 있었으며, 일본이 이 곳을 점령할 경우 네덜란드령 동인도(지금의 인도네시아) 지역을 침공하는 발판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위치 자체가 일본과 인도네시아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필리핀이 확보되어야 두 지역 간에 보급선을 확실하게 방호할 수 있었다. 필리핀 현지시간 새벽 3시경, 필리핀 주둔 미군은 진주만이 일본군에게 공습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미 일본과 일전은 사실상의 기정사실이 되어가고 있었으나, 결국 그 날이 도래한 것이다. 일본이 침공을 개시했다는 소식이 들어오..

[1950. 10] 6.25 전쟁에 참전한 소련군 에이스, 세르게이 크라마렌코 대위

소련 공군의 에이스인 세르게이 크라마렌코(Sergey Kramarenko, 1923~2020) 대위의 모습. 사진은 그가 소련 공군 제 324 전투항공사단 예하 176 호위전투항공연대에 소속되어 있던 당시 촬영한 것이다. 그는 2차 세계대전부터 참전했으며, 1951년 4월~1952년 1월까지 북한에 파병되어 총 15대의 UN군 항공기를 격추해 에이스가 되었다. : 소련의 '인민영웅' 칭호를 받은 에이스 조종사. 소련이 배출했던 '마지막' 에이스였으며, 2차 세계대전과 6.25 두 전쟁 참전 후 1970년대에는 이라크 공군과 알제리 공군 자문관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그는 소련군에서 공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우크라이나의 작은 마을인 칼리노프카(Kalinovka) 태생으로, 부모가 어려서 이혼하는 바람에 어머..

[1943. 10. 14] 스위스에 비상착륙한 미군 B-17의 '검은 목요일'

1943년 10월 14일, "검은 목요일(Black Thursday)"에 촬영된 사진. 이날 임무를 위해 출격한 출격한 총 291대의 B-17 플라잉 포트레스(Flying Fortress) 중 60대는 격추당했고, 17대는 심각하게 파손되어 귀환 후 폐기해야 했으며, 나머지 121대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어떤 형태로든 피해를 입었다. 미 제 8공군 제 305 폭격단 예하 364 폭격비행대대 소속 B-17F, 기체번호 4230831 WF-H "레이지 베이비(Lazy Baby)"역시 1943년 10월 14일 "검은 목요일"날 격추 당했다. 해당 기체는 스위스 슐라토프(Schlatthof)의 들판에 랜딩기어를 빼지 않은 채로 동체 착륙했으며, 이 파손된 기체는 곧 스위스 바젤란트의 애쉬(Aesch) 마을 중..

[1941. 12. 7] 일본, 진주만 공습 개시...미국의 2차세계대전 본격 개입

1941년 12월 7일, 2차 세계대전에 미국의 참전을 야기한 '진주만 공습'이 벌어졌다.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1882~1945) 대통령은 공습 직후 "앞으로 오늘은 치욕으로 기억될 날(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이라 언급했으며, 이 사건으로 전쟁 불개입을 표방하던 미국은 본격적으로 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게 되었다. 미 정부는 일본이 독일과 방공협정을 체결한 후 중국과 동남아 일대로 영토를 팽창하자 중일전쟁 이전 영토로 되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일본이 끝끝내 거부하자 미국은 국내 일본 자산에 대한 동결과 강철 및 유류에 대한 엠바고(embargo) 조치에 돌입했다. 영토가 팽창한 상태에서 유류가 제한 받을 경우 치명타가 될 ..

[1941. 12. 7] 일본 정부로부터도 이용당한 주미 하와이 일본대사, 노무라 제독

1941년 11월 14일, 주미 일본대사였던 기치사부로 노무라(野村 吉三郎, 1877~1964) 제독은 미-일 관계가 급속도로 냉각되자 절박한 심정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미 정부와 협상을 시도했으며, 일본 정부에는 미 정부와 협상을 하기 위해 융통성 없는 "데드라인"을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 진주만 공습이 시작되던 당시의 주미 일본대사. 와카야마(和歌山)현 출신으로, 일본 해군병학교(海軍兵學校) 26기로 입교하여 1898년 57명의 사관생도 중 2등으로 졸업했다. 견습사관을 거쳐 1900년 1월에 소위 계급을 단 그는 전함 미카사(三笠)에 배속되어 1901년부터 1902년까지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았다. 그는 러-일 전쟁이 발발할 당시 순양함 다카치호(高千穂)함 수석 항해사로 참전했으며, 전후에도 순양함..

[1941. 12. 7] 진주만 공습 직후 서류를 소각하는 하와이주재 일본영사관 직원

하와이(Hawaii)의 진주만(Pearl Harbor) 공습 직후인 1941년 12월 7일 오후 12:30분경, 하와이 경찰이 호놀룰루 소재 일본 영사관에 급습했을 당시 촬영된 사진. 당시 직원은 서둘러 주요 문서를 소각하고 있던 중이었다. 당시 일본 대본영은 작전 개시 전에 선전포고가 가해질 경우 미국이 사전에 대비할 것을 우려해 일본 외무성에 기습작전 내용을 알리지 않은 상태였다. 대본영은 나구모 주이치(1887~1944) 중장이 지휘하는 진주만 기습함대가 작전을 개시한 뒤에야 전세계 일본 공관에 비문화 한 선전포고문을 송달했고, 하와이 영사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일본 기습함대의 공습은 오전 7:50분부터 시작됐으며, 약 9:00시까지 한 시간 남짓동안 실시됐다. 이 날은 일요일이었으므로 영사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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