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오늘의 역사

사진과 함께 살펴보는 세계 속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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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205

[1865. 4. 9] 리 장군, 애포매톡스에서 그랜트에게 항복...美 남북전쟁 종료

1865년 4월 9일, 미국의 애포매톡스(Appomattox) 법원 건물에서 남부연합(Confederate States of America: CSA)군 총사령관인 로버트 리(Robert E. Lee, 1807~1870) 대장이 미 연방군(the Union: 북군) 총사령관 율리시즈 그랜트(Ulysses S. Grant, 1822~1885) 장군에게 항복했다. 게티스버그(Gettysburg) 전투 이래로 남부연합군은 계속 추격해오는 북군을 피해 수세에 몰려 있었다. 남부연합은 이후 윌리엄 테쿰세 셔먼(William Tecumseh Sherman, 1820~1891) 장군이 남부 주요지역과 애틀란타로 향하는 루트를 모두 초토화 시킨 "바다로의 행군(March to the Sea)"이 실시되면서 전력이 더 약..

[1945. 4. 6] 집중적인 가미가제 공격에도 살아남은 '죽지않는 배' 래피 함

1945년 4월 6일, 일본 연합함대는 오키나와 전투 지원을 위해 이동 중이던 미 해군 함대에 대해 대규모 가미가제 공격을 실시했다. 400대가 넘는 항공기를 투입한 일본은 이미 전력의 열세 차이가 분명했기 때문에 최후의 돌격전을 감행했지만, 대부분의 가미가제 항공기는 미 해군의 대공포나 F-6F 헬 캣(Hell Cat) 전투기에 격추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항공기가 방공망을 돌파해 자살돌격에 성공했으며, 총 30척의 함정과 3척의 지원함에 타격을 입혔다. 미 해군 구축함 래피(USS Laffey, DD-724)도 그 중 하나로, 이날 래피는 4차례의 폭탄을 맞았을 뿐 아니라 6대의 가미가제 전투기에게 피격당해 선미가 화염에 휩싸이며 32명의 수병이 전사하고 71명이 부상을 입었음에도 가라앉지 않..

[1941. 10] 말레이시아에서 훈련 중인 제 9 구르카 라이플 연대원들

1941년 10월, 말레이시아 정글에서 훈련 중인 영국군의 제 9 구르카(Gurkha) 라이플 연대 2대대원들의 모습. 인도의 삼 마넥샤우(Manekshaw) 참모총장(대장)은 한때 이 구르카 족을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누군가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놈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던가 구르카 족이던가 둘 중 하나다." 산악민족인 구르카는 네팔의 전통부족으로, 처음에는 구르카 인들끼리 부족생활을 했으나 네팔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네팔의 일부가 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이 "구르카"의 이름은 중세의 힌두 전사이자 성인인 구루 고라크나스(Guru Gorakhnath)에서 기원된 것으로 추정된다. 영국은 식민지 경쟁이 한창이던 19세기에 네팔로 침공했다가 구르카 족에게 처절한 참패를 당했는데, ..

[1944. 8] 파리 해방에 함께한 전설적인 여성 레지스탕스 대원, 시몬느 스광

전설적인 여성 레지스탕스 대원인 시몬느 스광(Simone Segouin)의 모습. 보통 가명이던 니콜 미네(Nicole Minet)로 더 잘 알려진 그녀는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했을 당시 18살에 불과했으며, 그녀가 독일을 상대로 한 첫 저항 행위는 독일군정청의 자전거를 훔치는 일이었다. 그녀는 자전거를 훔치기 전 독일군이 자신을 추격해오지 못하도록 다른 모든 자전거와 오토바이의 타이어를 터트려놓았다. 그녀는 레지스탕스에 합류한 뒤 문제의 자전거를 타고 레지스탕스 집단 간에 메세지를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워낙 학습이 빠른데다 손재주가 있어 순식간에 레지스탕스 전술과 폭발물 전문가가 되었으며, 레지스탕스 지도자가 되어 독일군을 사로잡고, 폭약을 설치하며, 독일군 물자에 사보타주를 가했다. 전쟁이..

[1967. 2. 13] 기습 당하고도 17:1의 교환 비율로 베트콩을 격파한 대한민국 해병대의 짜빈동 전투

1967년 2월 13일 밤, 베트남에 파병되어 있던 대한민국 해병 제 2여단("청룡"부대) 11중대는 짜빈동 인근의 한 작은 마을 옆 기지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날 밤, 두 개의 베트콩 연대가 짜빈동의 한국군 제 2해병여단의 주둔지를 사방에서 급습했다. 한국군 해병대 병사들은 각자 벙커에서 기관총과 박격포탄으로 응사하면서 엄청난 화력을 쏟아부었다. 곧 베트콩은 부대를 둘러싼 철조망을 뚫고 침입했으며, 이들의 숫자는 청룡부대 11중대원들의 숫자를 압도했다. 결국 쌍방은 기지 내에서 엉켜 백병전을 시작했으며, 해병대원들은 항복하기를 거부하고 각자 진지에서 끝까지 버텼다. 국군 병사 한 명은 치명상을 입고 포위 당하자 산 채로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그 자리에서 수류탄 핀을 뽑아 그의 진지로 뛰어들어온 베트콩..

[1968. 2. 17] 테트공세 중 지프차 뒤에 은폐한 미 해병대 병사들

1968년 2월 17일, 베트남 공화국의 위에(Hue)에서 촬영된 미 해병대 병사들의 모습. 구정공세(Tet Offensive) 당시 촬영된 것으로, 두 병사는 파괴된 지프차를 은폐물로 삼아 도시 내에서 시가전을 전개 중이다. 당시 미군은 피아식별이 어려운 환경이었으므로 집집마다 다니면서 수색을 시도했다. #베트남전쟁 #전쟁사 #역사사진

[1939. 3. 28] 프랑코, 마드리드를 함락하며 내전 승리

1939년 3월 28일,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Francisco Franco, 1892~1975)와 그의 파시스트 군대가 3년여에 걸친 포위전 끝에 마드리드를 점령했다. 스페인 내전은 1936년 7월, 프랑코가 민주적인 선거로 수립된 스페인 제 2 공화국을 축출하기 위한 쿠데타를 일으키며 시작됐다. 모로코에 주둔 중이던 프랑코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쿠데타를 모의했지만 실패했으며, 결국 이것이 내전으로 이어졌다. 민중전선, 사회주의세력, 공산주의세력, 무정부주의 세력을 비롯한 좌파성향 집단은 제 2 공화국을 지원했으며, 왕정주의 세력, 보수주의 단체, 파시스트 단체, 반동주의 단체, 기타 스페인 극우주의 세력은 프랑코의 국수주의 세력을 지지했다. 프랑코는 최초 북부 스페인의 지지를 얻었으며, 전쟁이..

[1944. 8.] 연합군이 유럽 상륙지역으로 노르망디를 선택한 이유?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유럽 상륙작전, 통칭 '오버로드(Overlord)' 작전을 왜 하필 프랑스 끝자락의 노르망디로 삼았는지를 설명하는 자료. 그림만 척 보면 아하! 싶을텐데, 쉽게 말해 상륙부대가 상륙을 실시할 때 가장 넓은 면적에서 함포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지형이었기 때문. 또 하나의 이유는 프랑스 중앙부에서 노르망디로 통하는 철도가 단 하나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슨 소리냐 하면, 연합군이 상륙을 시작한 것을 독일이 눈치채더라도 철도를 이용한 대규모 증원이 불가능했다는 의미이다. 이 때문에 레지스탕스도 주기적으로 이 철도길을 적지 종심 내에서 끊어댔다. 이는 독일군이 주로 철도에 주로 군수지원을 의존했다는 점에서도 독일에게 불리한 점이었다. 실제 이 때문에 전선이 커지면서 장거리 이동을 실..

[1945. 5. 23] 일본 항복 하루 전날 첫 전장에 투입된 미 해군 항모

미 해군의 시보니 함(USS Siboney, CVE-112/AKV-12)은 커멘스먼트 베이(Commencement Bay)급 호위항모였다. 시보니는 1945년 5월 23일에 치장공사를 완료했으며, 그 해 중순부터 전장에 투입됐지만 시보니가 일본에 도착하기 바로 전날 일본이 항복했다. 하지만 1950년 6월, 대한민국에서 전쟁이 벌어지자 동원 함정이 더 필요했던 미 해군은 시보니를 예비함에서 현역함으로 환원했다. 시보니는 1952년 1월 A-1 스카이라이더(Skyraider)와 F4U 코르세어(Corsair) 전투기의 항모 운용 평가에 투입됐다. 미 해군은 또한 미 해병대용으로 개발한 신개념의 수직이착륙 헬리콥터 시험평가에도 시보니함을 사용했다. 하지만 시보니의 항해는 1956년을 끝으로 끝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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