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오늘의 역사

사진과 함께 살펴보는 세계 속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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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205

[1946. 5] 포로가 된 병사들을 위로한 명견, 디킨 훈장 수상

포인터 순수혈통인 "주디(Judy)"는 태평양 위에서 활약한 몇몇 함정에서 마스코트였으나, 1942년에는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포로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 주디는 그 곳에서 만난 항공병인 프랭크 윌리엄스(Frank Williams)와 얼마 안되는 배급 쌀을 나눠먹는 사이가 되었다. 주디는 연합군 포로들이 사기를 유지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독이 있는 뱀이 수용소 안에 들어오거나, 악어나 호랑이 같은 맹수들이 근처에 접근해도 크게 짖어 동료들에게 알렸다. 포로들은 얼마 후 싱가포르로 다시 이송됐는데, 포로들은 주디를 쌀포대에 몰래 넣어 함께 이동하며 그녀의 존재를 끝까지 간수들에게 들키지 않았다. 하지만 수송선은 이동 중 연합군의 어뢰에 맞았다. 윌리엄스는 주디를 구하기 위해 선체가 가라앉기 전에 그녀를..

[1950. 9] 북한 인민군의 리학구 총좌, UN군 투항

1950년 9월, 대구에서 미군에게 투항한 직후 촬영된 북한 인민군의 리학구(李學九, 1922~1963) 총좌. 그는 낙동강까지 진출한 인민군 제 13사단 참모장이었으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인민군의 선두부대와 후속부대 간 허리가 끊기자 마주 대치 중이던 미 제 1기병사단 8기병연대 1대대 B중대에 투항했다. 그는 6.25 전쟁 중 UN군의 포로가 된 인민군 최고위급 장교였으며,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가 휴전이 되고 나서야 포로교환이 이루어져 북한으로 돌아갔다. 그는 1952년 여름 거제도에서 일어난 공산 포로 폭동사건의 주동자이기도 했다. : 에서도 소개된 인물. 총좌는 현재 폐지된 계급으로, 국군 계급에 대응하자면 준장에 가깝다(소좌-중좌-대좌-총좌). 소속대인 인민군 13사단은 개전 초부터..

[1944. 9. 9] 혁혁한 전과에도 이어진 불운 끝에 사라진 잠수함, 스캠프 함

1944년 9월 9일, 하와이 제도 해안에서 훈련 중이던 미 해군 가토(Gato)급 잠수함인 스캠프(USS Scamp, SS-277)함과 위크스(Wickes)급 구축함인 츄(USS Chew, DD-106)함이 충돌했다. 당시 사고는 스캠프 함이 한창 물 속에서 부상하던 도중 수면 위의 위크스 함을 보지 못해 발생한 사고였다. 스캠프는 부상하던 중 충돌한 바람에 선수 부분이 크게 파손됐다. 이후 스캠프는 진주만으로 가 한참 동안 수리했으며, 10월 16일에야 다시 출항이 가능해 졌으므로 여덟 번째 항해에 나섰다. 하지만 스캠프는 운이 없는 배였다. 1944년 4월, 이번에는 필리핀 민다나오 섬 인근에서 수상기가 투하한 폭탄에 크게 맞았고, 아마도 이 때까지 적 폭탄에 맞고도 살아남은 모든 연합군 함정 중에..

[1915. 4. 22] 이프레 전투 중 독가스 공격을 받은 프랑스군 진지의 참상

1차세계대전 중 진지에서 가스를 살포한 뒤 밖으로 탈출 중인 독일군 병사들의 모습. 1915년경 사진을 디지털 채색한 것이다. 1차세계대전에 참전한 독일군 병사인 빌리 시베르트(Willi Siebert)는 1915년 4월 22일 이프레(Ypres)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참호전을 치르던 중 염소(鹽素) 가스를 살포했던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으로 남겼다. "결국 우리는 가스를 살포하기로 했다. (중략) 그 날은 날씨가 좋아 태양볕이 아름답게 내리쬐고 있었다. 잔디가 있는 곳은 눈이 부시도록 푸르른 녹색이었다. 이 곳에서는 피크닉을 즐겼어야 마땅한 곳이지, 우리가 이후에 자행한 짓을 저지를 곳이 아니었다. 우린 보병을 모두 불러들인 후 선으로 연결된 가스 밸브를 열었다. 저녁 쯤 되자 가스가 프랑스군 ..

[1971] 독일 사진사가 촬영한 베트남 인민군 연인

베트남 전쟁 중후반인 1971년, 독일의 사진가 토마스 빌하르트(Thomas Billhardt, 1937~)가 촬영한 어느 베트남 인민군 소속 남녀의 모습. 둘 다 모두 모신-나강(Mosin-Nagant) 소총을 메고 여유롭게 걷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 토마스 빌하르트는 동독 태생의 사진가이자 언론인이다. 주로 분쟁지역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으며, 특히 베트남, 팔레스타인, 니카라과, 북한에서 다수의 사진을 찍었다. 1963년 라이프치히의 시각예술 전문 학교인 HGB를 졸업했으며, 1963년부터 프리랜서 사진가가 되어 1971년까지 활동했다. 독일 통일 후인 1989년부터 2001년까지 독일 사진가협회 회원이었으며, 2005년에는 UNICEF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필리핀, 인도네시아, 중국 등지에서..

[1939. 4. 18] 훈련 후 아리아케 만에 부상한 일본해군 I-71 잠수함

일본 해군의 이(伊)형 잠수함인 I-71함이 훈련 후 부상한 모습. 앞에는 I-73함과 I-72함이 보인다. 1939년 4월 18일에 아리아케(有明) 만 앞에서 촬영된 사진. I-71함은 고베(神戸)에 있던 가와사키(川崎) 조선소에서 건조했으며, 1933년 2월 15일에 착공하여 1934년 8월 25일에 진수했다. I-71함은 1935년 12월 24일에 건조가 끝나 취역했으며, 취역 후 구레(吳) 해군조병창에 배치됐다. 일본 해군은 테평양 전쟁이 임박하자 I-71함을 'Z 작전'에 투입해 진주만 공습에 참가시키고자 했다. 이에 따라 I-71함은 제 3 잠수함전대 20 잠수함대대에 배치하려 했으나, 작전 단행 직전에 편성이 변경되면서 제 6함대 전방원정단에 배치됐다. 1941년 11월 11일, I-71함은..

[1916] 솜므 전투 후 독일군 부상병을 치료하는 프랑스군 병사

1916년 솜므(Sommes) 전투 직후 쓰러진 독일군 병사를 일으켜 세우고 있는 프랑스군 의무병의 모습. 솜므 전투는 1916년 7월 1일부터 시작해 11월 18일까지 만 4개월 보름동안 진행됐으며, 가스를 비롯한 생화학 무기가 등장하면서 16만 4천명 이상의 병사가 전사했다. #1차세계대전 #전쟁사 #역사사진

[1945. 9. 8] 2차세계대전 패전 후 귀향 열차를 기다리는 일본 육군 병사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후 약 540만 명의 일본 육군 병사와 180만 명의 일본 해군 수병이 연합군 포로로 사로 잡혔다. 전쟁 막판에 본토 공습을 당한 일본은 파괴된 인프라 뿐 아니라 1946년에 찾아온 대 기근 때문에 식량이 심각하게 부족했고, 거의 700만 명의 포로를 잡고 있던 연합군 역시 구 일본군 포로와 민간인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어려웠다. 한편, 종전이 선언된 뒤에도 태평양 일각에서는 항복하지 않고 버틴 일본군 병사들이 남아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1974년 3월에 가서야 항복한 필리핀 루방 섬의 오노다 히로( 小野田 寛郎, 1922~2014) 중위가 있었고, 바로 9개월 뒤인 1974년 12월에는 인도네시아 모로타이 섬에서 저항하던 나카무라 테루오(中村 輝夫, 1..

[1944. 12. 15] 미국의 전설적인 트럼본 연주자 글렌 밀러, 위문공연 차 비행 중 실종

1944년 12월 15일, 미국의 전설적인 트럼본 연주자이자 음악가인 글렌 밀러(Alton Glenn Miller, 1904~1944)가 실종됐다. 1904년 미국 아이오와(Iowa) 태생인 글렌 밀러는 밴드 리더로 활약하면서 2차세계대전 세대에게 큰 영감을 준 인물이다. 그는 1930년대 말부터 1940년대 초까지 인기를 끌었으며, "달빛 세레나데(Moonlight Serenade)"나 "턱시도 정션(Tuxedo Junction)" 같은 히트곡들을 남겼다. 1942년, 그는 미 육군에 입대했으며, 미 육군은 그를 육군 항공대 밴드에 배치했다. 그는 이 곳에서 활동하면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미군 장병이 있는 전세계 각지를 다니며 히트곡들을 연주했다. 그는 의문의 실종이 발생하기 전에도 영국에서 ..

[1962] 전선 없는 베트남에서 목숨을 걸고 부상자를 돌본 간호장교단

베트남 전쟁 중 활동한 미군 간호장교의 모습. 베트남 전쟁 중 여성의 간호사 역할은 부상병 치료에 있어 핵심적이었다. 1960년대는 아직 여성이 군에서 활동하기에는 제약과 차별이 컸던 시기지만, 이들은 애국심 하나로 죽음이 도처에 만연한 이역만리의 전장까지 가 이 곳에서 부상을 입고 병든 병사들을 치료했다. 베트남 전쟁 기간 중 복무한 여군 간호 인력은 7,000명에 달한다. 이들은 총을 쥐고 전선에서 싸운 것은 아니지만 "전선" 구분이 없던 베트남의 정글 속에 임시로 차려진 야전병원 천막 아래에서 분투했다. 이들에겐 항상 자원이 부족했고, 의료 장비나 의약품도 모자랐다. 이들 간호 인력은 전장 위에서 의료 활동 뿐 아니라 원거리까지 원정을 와 정신적으로 지친 병사들의 심리 상담까지 병행했다. 이들은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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